[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한수 실수로 사색된 유창혁 "대책 없나…"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8시 47분


◆n016 배달왕 도전3국 : 흑 이세돌 3단-백 유창혁 9단

장주주(江鑄久) 9단은 이세돌 3단에 대해 “도무지 장고하는 법을 몰라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도전기나 예선전이나 대국의 경중에 상관없이 속기로 일관하는 이3단의 버릇을 빗댄 말이었다.

20일 서울 한국기원내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유창혁 9단과 이세돌 3단과의 %016배 8기 배달왕 기전 도전3국. 1대1 동률인 상황에서 도전기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승부처다.

그래서일까. 장고하는 법을 모른다는 이3단이 첫수부터 3분 이상 뜸을 들였다. 이에 질세라 유9단도 2분간의 숙고 끝에 돌을 놓는다. 그러나 이후 이3단은 예의 손바람을 내고 있었고 유9단의 손길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난전에 난전을 거듭하던 반상에 백이 유리하다는 설이 퍼져나갈 무렵. 유창혁 9단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입술이 한순간 허옇게 변했다.

그동안 잘 이끌어온 바둑을 한수의 실착으로 버려놓았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치는 듯 신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면도 백 8이 엉터리수. 13의 곳이 백의 선수였던 만큼 그냥 14의 곳에 둬 살았어야 했다. 40집이 넘는 하변의 백대마가 패에 걸리면서 이제 주도권을 흑에게 넘겨줬다.

[장면도]

흑 1의 날일자로 미끄러진 수가 검토실에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하변에 있는 2개의 백대마를 동시에 노리는 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는 검토실의 생각만큼 강력한 수는 아니었다. 대국후 유창혁 9단은 백 8로 14 지점에 놓았으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나’‘다’ 세곳의 약점 때문에 백 13으로 두는 것이 선수여서 하변 우측 대마가 살아있다는 것.

허탈감에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려버린 탓일까. 유9단의 얼굴에선 희멀건한 자조의 미소가 내비친다. 상대인 이3단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대책이 없나…”하고 힘없이 말끝을 흐린다. 반면 그동안 따분한 표정이던 이3단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생기를 띠며 반상을 내려보기 시작했다.

검토실은 이미 파장 분위기. 유9단의 패색이 짙어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일까. 칼을 높이 빼든 이세돌 3단의 손이 주춤주춤거리고 있었다. 과감하게 백의 명줄을 끊어버릴 기회를 맞이하고도 그가 내미는 칼끝은 자꾸 백의 급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흑이 팻감을 쓰면서 오히려 중앙에서 10여집이 넘는 큰 손해를 보자 검토실에는 백 부활설이 꿈틀댄다. 유9단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돈다.

이3단이 끝내 하변 백대마를 잡았지만 우상귀 백의 침입을 허용해 도저히 덤을 낼 수 없게 되자 가만히 백돌 2개를 집어 반상 위에 올려놓았다. 돌을 던진 것.

바둑이 어려웠던 탓인지 두사람의 복기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이3단은 졌지만 평소처럼 활기차게 복기를 했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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