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플로리다의 손…최종판단은 인간의 손에

  • 입력 2000년 11월 20일 18시 58분


미국 플로리다주에 여러 종류의 손이 있다. 7일 대통령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던진 유권자의 신중한 손이 있는가 하면, 지지하는 후보에게 환호하는 활기찬 손도 있다. 컴퓨터에 맡겼던 투표 결과가 미덥지 못해 재검표를 하다 지친 손도 있고, 이 수검표 결과를 개표결과에 반영할 것인가를 판정해야 하는 대법원의 무거운 손도 있다.

이 손들은 각 국민 주권의 몫이 가장 공정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대 그리스시대에 데모크리토스가 인간 세계의 정의 실현 과정에서 신을 배제한 이후 ‘각자에게 그의 몫’이라는 그리스의 오랜 전통은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실현돼야 했다. 그리고 인간이 계급과 종족과 인종의 벽을 넘어 점차 많은 인간을 동료로 인식해 가면서, 이제 정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통의 척도’는 인류 전체에 통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게 됐다.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한 가지 ‘공통의 척도’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중요한 최종 판단은 인간이 내려야 한다는 상당히 원론적이면서도 모호한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의 타당성마저 논란이 되는 현실이고 보면 그 이상의 ‘공통의 척도’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신 대신 이제는 컴퓨터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지켜 주기를 기대했던 인간은 번거롭게도 다시 인간의 손으로 그 일을 하게 됐다. 재검표도, 법원의 판정도 다시 인간의 손에 맡겨졌다.

실제 투개표를 하기도 전에 가상 투표와 같은 가상조작(simulacre)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며 전지전능한 신의 흉내를 내던 인간은 한 표 한 표를 손으로 확인하며 기계의 부정확성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환상 아래 얼마나 많은 불공정 행위가 은폐되고 있는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미국인은 부시후보와 고어후보의 대접전이 수검표 결과의 인정 여부에 대한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다는 이번 주 안에 끝나기를 바란다. 예상 밖의 기나긴 공방에 식상하기도 했거니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정착된 미국 정도라면 둘 중 누가 대통령이 되든 큰 차이는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표 차이에 의한 것이든, 당선확정과 취임이라는 사건은 두 후보의 인생을 바꿔놓을 뿐 아니라 미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 한 표를 행사한 국민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새 정부의 정책은 국민 개개인의 세금 부담과 실업 가능성과 전쟁 참전 등의 문제와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가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에게 사건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실제로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형식적 행위가 이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역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선확정 또는 취임식이라는 형식적 행위는 한 사람에게 국민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고 새로운 국정 방향을 이끌어 갈 권리를 부여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 현실의 힘을 부여하는 선거는 그 힘을 허가하는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그 주권의 몫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논란이라면 얼마든지 가치 있는 일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최적의 ‘공통의 척도’를 찾고자 노력하며 ‘척도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진리를 확인하고 있다.

손은 검표도 하고, 기도도 하고, 삿대질도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손은 대통령에 취임하며 그 손에 국민 주권의 일부를 양도받는 시뮬라크르의 순간을 장식한다.

<철학박사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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