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 사람 세상]'주문출판'의 확대

  • 입력 2000년 11월 17일 18시 42분


얼마 전에 신작 소설 ‘공생충’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방한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는, 제록스사와 함께 주문출판(on demand publishing)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100편 정도를 인터넷을 통한 독자의 주문에 따라 인쇄, 제본하여 판매하고 있다.

◇소량주문에 빠르게 대응

역시 일본의 이와나미출판사는 절판된 책을 중심으로 주문출판을 하고 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수요가 있다고 해도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을 대량으로 펴내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주로 학술도서 주문이 많은데, 매출액이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고 한다. 편집, 인쇄, 제책 설비에 최신의 디지털 기술이 적용됨으로써, 소량 주문에 빠르게 응하여 재고 부담을 남기지 않는 주문출판이 새로운 출판 형태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모 업체에서 개인이 전자책을 제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고, 청주인쇄출판박람회에서도 멀티미디어 전자책 제작 소프트웨어가 선을 보인 바 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개인이 저작물을 전자책으로 제작하여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련 기술의 발전은 역량 있는 개인이 독창적인 출판 콘텐츠를 독자적으로 제작, 판매할 수 있는 안정적인 체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개성있는 편집 가능

조심스런 예측이지만, 종이책과 전자책에서 공히 주문출판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자들에게 세계 유일본을 제공할 수도 있다. 같은 책이라도 판형, 디자인, 서체 등을 주문에 따라 다르게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렇게 개별 제작된 책은 사실상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본이 될 것이고, 그것을 소장하는 독서인으로서는 각별한 느낌을 지닐 수 있다.

어느 경우든지, 일종의 탈중심, 개성의 최대화, 제작 및 유통 과정의 분권화 등을 특징으로 한다. 결국 대량 생산된 기성품으로서의 책이 아니라, 유일무이의 개성이 살아 숨쉬는 ‘나만의 책’, ‘맞춤 책’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다양해진 '선택의 범위'

벤처기업가이자 사회학자 피에르 레비는, ‘Qu’est―ce que le virtuel?’(버츄얼이란 무엇인가?)에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주관과 객관, 사유와 공유, 저자와 독자 등의 관계에서 이른바 뫼비우스 효과가 확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소와 시간은 뒤섞여 있다. 명확했던 경계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다차원적으로 분열되고 중첩되어 있는 일련의 구획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새로운 매체 기술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출판이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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