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병기/현대건설의 가치

  • 입력 2000년 11월 9일 18시 49분


현대건설 처리 문제가 지지부진하자 “시장원리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시장논리대로 처리하자’는 주장에는 100% 공감한다. 하지만 최근 시장의 반응은 정몽헌(鄭夢憲)회장 등 현대 경영진의 계속되는 무능에 화가 나 감정적인 대응이 배어있다는 느낌이다.

이제는 ‘현대건설이라는 좋은 회사’와 위기상황을 초래한 ‘경영진’은 분리해서 생각할 때가 아닐까.

현대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국내는 물론 해외공사 수주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현대건설은 한국 건설업체의 해외 건설수주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에 현대건설을 대체할 회사가 없기 때문에 현대건설의 법정관리는 수천억달러의 해외건설시장에서 ‘한국이 퇴출’되는 상황을 불러온다.

또 현대건설의 국내 공사현장은 418곳, 해외사업장은 115곳(33개국)에 이른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법정관리인이 오더라도 본사에서 수천㎞ 떨어진 해외사업장을 통제하기는 어렵다. 건설업의 특성상 전권을 가진 현장소장들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빠지면 회사는 순식간에 껍데기만 남는다.

이쯤되면 현대건설은 청산단계에 접어든다. 수조원의 가치를 지닌 영업력, 기술력 등 무형자산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순간이다. 이 때문에 현대건설의 법정관리는 회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수가 될 우려가 크다.

회사는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저절로 굴러가는 조직이 아니다. 회사의 본질은 오랜 기간 사람들과 조직에 축적된 암묵지(暗默知·tacit knowledge)에 있다. 이런 아까운 경쟁력을 갖춘 회사가 오너의 잘못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면 오너를 갈아치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회사 내부에서 책임감 있는 전문경영인을 발탁해서 회사를 꾸려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 수 있다.

구조조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구조조정은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병기<경제부>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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