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프리즘]김미현/辛福만을 바라는 사람들

  • 입력 2000년 10월 31일 18시 59분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은희경의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정지우감독의 영화 ‘해피엔드’의 제목들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내 맘대로의 정답은 제목이 내용이나 결말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헉슬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과학의 발달로 인한 끔찍한 미래였다. 은희경은 부도덕한 사랑보다 더 명백히 부도덕한 것이 관습적인 도덕이라고 본다. 영화 ‘해피엔드’의 결말은 인생이나 사랑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사어(死語)일 뿐임을 알려준다.

제목이 내용을 배신하기는 시청률 1위라는 TV드라마 ‘가을동화’도 마찬가지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맞는지는 몰라도 드라마의 내용은 ‘동화’는 아니다. 동화는 어린이에게 꿈과 낭만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사라져 가는 ‘인어공주’의 슬픈 결말은 할리우드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억지로 행복하게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

‘가을동화’도 사람이 아니라 눈물이 주인공인 최루성 멜로물이다. 남매였던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이라는 신파적 내용답게 손수건 없이는 볼 수가 없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수도꼭지처럼 틀기만 하면 수시로 ‘준비된’ 눈물을 쏟아낸다. 사정은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가을에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울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가을에 대한 예의인 것처럼 간주되니 합법적이기도 하다. 봄에 울면 청승이고, 여름에 울면 눈치 없으며, 겨울에 울면 티내는 것이 되니까.

하지만 시청자들은 욕심이 많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못다 핀 꽃’이 아니라 ‘눈물 속에 피는 꽃’이다. 그래서 여주인공 송혜교를 죽이지 말고 오빠 송승헌과 맺어줘야 한다는 의견을 인터넷 게시판에 열심히 올린다. 심지어 그녀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보내는 원빈과 맺어져야 한다고도 한다. 명실상부하게 ‘동화’가 되라는 것이다.

하기야 이런 행복에 대한 강박증은 고질병인 듯도 하다. 예전에 TV드라마 ‘애인’에서 유동근과 황신혜의 불륜 아닌 불륜이 성과가 있기를 우리는 얼마나 바랐던가. ‘꼭지’에서 아줌마 박지영과 열혈남아 원빈을 맺어달라고 얼마나 떼를 썼던가. 요즘에는 ‘덕이’에서 덕이의 신랑감으로 의리 있는 김태우가 적격이라는 의견도 강하게 내놓는다. 사랑은 무조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청자들의 억지 때문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사람도 많고, 헤어질 뻔했다가 다시 만난 연인도 많다.

물론 TV드라마와 영화는 다르지만 최근 개봉한 왕자웨이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돋보이는 것은 이런 행복 강박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모두 위험해진다. 위험하니까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더욱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그리워 하기는 얼마나 힘든가. 이 영화는 ‘인생이나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의미한다는 제목을 배신함으로써 사랑의 이런 모순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본래 연가(戀歌)의 8할은 만가(輓歌)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행복해지기만을 바란다. 불행하면 죽는 줄 안다. 언제나 아이일 수는 없는데도 동화 같은 사랑만을 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꿈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할리우드나 불가능한 사랑도 가능하게 해주는 ‘노팅힐’이 아닌데도 말이다. 꿈을 잃어버렸거나 실연을 당한 후에도 삶은 지속돼야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에게는 행복해질 권리도 있지만 불행을 책임질 의무도 있다. 행복이란 불행으로부터 훔쳐온 ‘불씨’같은 것이다. 그러니 제발 슬픔을 슬픔에게 주고, 불행을 불행으로 겪자. 일부러 불행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라 불행으로부터 도피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 때 생기는 불행에 대한 내성(耐性)이 바로 행복을 위한 예방주사니까. 예방주사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으로 병에 대한 면역성을 길러주는 것이니까.

그러니 처음에 낸 문제의 정답을 다음처럼 고쳐보자. 내용이나 결말이 제목을 배신하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제목의 의미를 배가(倍加)하는 것들이라고. 그래서 원래대로 슬프게 끝내겠다는 ‘가을동화’ 제작진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이 박수는 행복욕에 빠진 나약한 우리에게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김미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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