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WP의 ‘고어 지지’ 사설

  • 입력 2000년 10월 23일 18시 50분


미국 뉴욕타임스는 대통령 선거는 물론 뉴욕 시의회 선거에서도 선거구별로 특정 후보 지지를 천명한다. 97년 뉴욕시의회 선거 때 맨해튼 10 선거구에서는 이스트 할렘 지역의 대형 슈퍼마켓 건설에 찬성하는 길레르모 리나레스 후보가 재선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기사를 썼다. 시의원 후보들에게 선거자금을 많이 기부하는 식료품 가게 주인들이 반대하지만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서야 일자리도 생기고 주민들이 식료품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23일자 통단(通段) 사설을 통해 고어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 사설은 고어 씨가 가장 잘 준비된 대통령 후보이고 총명하며 경제 외교 사회 정책에서 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워싱턴 포스트사가 아니라 ‘사설란이 고어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점이다. 다른 선거 기사는 고어 후보를 지지한 사설과 관련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고어 지지도가 떨어졌는데도 유력지들은 당선 가능성과 관계없이 고어 후보를 지지하는 추세이다.

▷19세기 미국에서는 재정 기반이 취약한 신문들이 특정 정당 후보로부터 지원을 받고 선거운동 전단에 가까운 지면을 만들었다. 미국 신문의 특정후보 지지 전통은 처음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객관적 저널리즘의 전통이 확립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미국의 유력지들은 사설에서 특정후보를 지지하더라도 기사는 공정하게 쓰기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한 후보와 그 후보를 지지하는 독자들로부터 반발을 사는 일이 없다.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어떤 언론사도 특정 후보 지지를 천명하지 않는다. 어느 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공정한 보도를 하겠노라는 다짐이 신문마다 넘쳐난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나면 어떤 신문의 기사가 어느 후보에게 기울어졌다는 식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언론학자들은 역설적으로 한국 신문들이 사설로 특정 후보 지지를 당당하게 밝히는 시기가 와야 선거 기사의 공정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말한다.

<황호택 논설위원>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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