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원암/외환자유화 연기하라

  • 입력 2000년 10월 22일 18시 31분


“금융시장이 안정된 후 자본자유화를 하십시오.” 이는 금융 안정을 위해서 자본통제를 결행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총리가 한 말이 아니다. 정통 경제학자이면서 자본자유화에 관한 한 이단적 정책을 제시했던 미국 프린스턴대 폴 크루그먼 교수가 한 말도 아니다.

▼IMF도 신중한 도입 촉구▼

놀랍게도 외환위기 후 국제통화기금(IMF)의 아시아태평양 국장으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진두 지휘했던 휴버트 나이스씨가 필자가 참석한 5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 말이다.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에 골몰하던 98년 6월, 2000년 말까지 외환거래를 전면 자유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예 외환거래 규제가 2000년 말이 되면 자동적으로 사라지도록 ‘일몰 조항’을 조문화했다. 당시 우리는 4대 부문의 개혁과 시장경제의 조기정착에 매진하고 있었으므로 과감한 외환자유화 정책이 특별히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 외환위기가 브라질과 러시아로 확산되자 국제금융시장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해외 투자가들의 투기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아시아 외환위기도 해외 투자가들의 급격한 자본유출에 기인한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게 됐다. 98년 9월 말레이시아는 자국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본통제를 단행했으나 일부에서 경고한대로 말레이시아 경제는 일대 혼란에 빠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빠르게 회복됐다.

자본시장의 자유화는 무역의 자유화와 크게 다르다. 정보 통신의 발달로 해외자본이 분초를 다투며 이동하는 지금, 아직도 불안한 우리 경제를 국제금융시장에 내맡길 수는 없다. IMF도 국내 금융시장이 불안할 때에는 자본자유화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IMF는 한국 외환거래의 완전자유화를 요구했습니까?” 세미나에서 필자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이스 전 국장은 자본시장의 완전 자유화는 IMF가 요구한 사항이 아니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한국이 선택한 정책이라고 대답했다.

이제 우리가 약속한 2단계 외환자유화 계획이 발표됐다. 내년부터 해외여행 경비, 증여성 송금, 해외이주비 지급한도, 해외예금의 제한이 폐지되고 해외 증권투자도 자유로워진다. 기업들이 수출대금 중 국내에 들여오지 않고 해외에 예치할 수 있는 범위도 확대된다.

가뜩이나 국내 금융시장이 불안해서 달러를 사서 모아둘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판에 외환자유화 계획이 발표되자 국내자본의 해외도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내년은 예금부분보장제와 금융실명제 및 외환자유화가 동시에 시행돼 국내 금융시장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거액 재산가들이 해외로 발길을 돌릴 공산이 크다.

정부는 발빠르게 고액자금을 대외에 지급할 때 한국은행 및 국세청에 통보하고 해외에 예금하거나 증권투자를 할 때에는 국내 금융기관을 경유하도록 하는 보완책을 내놓았다. 또한 불법자금의 유출입을 막기 위해 금융정보 분석기구를 설치할 계획이다.

▼금융시장 안정이 먼저▼

과연 이러한 보완대책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국내 금융시장이 불안해서 거액을 해외에 예치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국세청을 동원해서 막는다면 외환자유화에 역행하는 처사다. 거액 예금을 국내 금융기관에 예치할 때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해외에 예치하겠다고 해서 자금출처를 조사한다면 불만만 늘어날 것이다. 힘있는 사람들은 거액을 해외로 빼돌리는데 힘없는 사람들만 국세청에 당할 수도 있다.

2단계 외환자유화가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대책이 되지 않으려면 정부가 당초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책의 신뢰도는 약속을 지킨다고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여건이 변하면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

현재 우리의 구조조정은 당초 예상보다 지체되고 있으며 금융시장의 불안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예상이 빗나가면 당초의 계획을 수정해 보다 일관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정책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금융시장이 안정될 때까지 자본자유화에 신중을 기해 줄 것을 촉구한다.

박원암(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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