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물고기자리>집착하는 사랑

  • 입력 2000년 10월 18일 17시 38분


"영화는 음식과 같아서 불량식품을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나쁜 영화를 보면 탈이 나요."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애련(이미연)은 '나쁜 영화'를 빌려가려는 손님에게 이런 충고를 던진다. 그녀가 말하는 나쁜 영화와 좋은 영화의 차이는 물론 <물고기자리>를 연출한 김형태 감독의 시선이다.

<물고기자리>에서 김형태 감독은 좋은 영화의 목록 안에 프랑스 누벨 이마주 감독들의 영화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비디오 숍의 전경을 훑는 카메라는 장 자크 베넥스의 <디바>와 뤽 베송 감독의 <그랑부르> 비디오 커버를 길게 비추고 지나간다.

이 섣부른 오마주에 식상할 무렵이면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사랑하면 이들처럼>의 비디오테이프가 비춰지고, 가끔 <바그다드 카페>의 첫 장면이 반복적으로 리와인드된다.

그러나 진짜 <물고기자리>가 교본으로 삼는 영화는 따로 있다. 라디오 스타를 사랑한 한 여자의 가련하고 중독적인 사랑을 담아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68년 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가 바로 그것이다.

<물고기자리>의 동석(최우제)은 라디오 스타까진 아니더라도, 한때 카페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학생들의 심장을 멎게 했던 아마추어 가수다. 하지만 지금은 앨범 한 장 내기가 쉽지 않은 가수 지망생으로 전락해 있다.

영화는 백수나 다름없는 동석과 사랑을 모르는 순진한 29세 노처녀가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비디오 가게를 선택한다. 비디오 가게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쉽게 타인과 감정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곳. 멜로 영화의 배경이 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비디오 가게 주인 애련은 가게에 들러 가끔 프랑스 영화를 찾는 동석에게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두 사람 사이엔 물론 공통점도 많다. 노란색 금붕어 '레몬 필 엔젤'을 좋아한다는 것과 커트 코베인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것.

하지만 동석에게 애련은 허물없이 맘을 터놓고 싶은 친구 이상은 아니고, 애련에게 동석은 모든 걸 다 주고도 모자란 애인 같은 남자다. 두 사람의 엇갈린 사랑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 멜로드라마처럼 시작됐던 이 영화는 갑자기 장르의 푯말을 사이코 드라마 쪽으로 급선회해버린다.

사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시도한 급격한 장르의 비틀림을 쉽게 눈치챌 만도 했다. 영화 초반부터 애련의 집착적인 성향은 뻔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련은 방바닥의 먼지 하나도 그냥 놔두지 못했고, 다 해져 가는 지갑에 본드 칠을 하며 "이 지갑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지갑"이라는 순정만화 적인 대사를 남발했다.

애련은 또 노란색에도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금붕어의 색깔도, 그녀가 모는 소형차의 색깔도, 그녀가 자주 걸치는 카디건의 색깔도, 그녀가 좋아하는 주스의 색깔도, 그녀가 덮고 자는 이불과 베개의 색깔도, 모두 노란색이다. 그만큼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에 열정적으로 집착했던 것이다.

한 가지 색깔에 집착했던 만큼 한 남자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이미 결혼할 여자가 있는 동석에게 애련은 이렇게 말하며 울부짖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가 정말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간절히 원한다'는 이 성스러운 대사는 엇갈린 사랑을 하는 두 사람에겐 결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애련은 '간절히 원하는 것'과 '집착'을 매번 헷갈려 하고 있으며, 사랑에서만큼은 간절히 원함 혹은 집착이 파멸을 불러오기도 한다는 걸 끝내 깨닫지 못한다.

동석의 집에 잠입한 애련이 그가 즐겨 입던 청 남방을 걸치고 거울을 마주보며 동석을 흉내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절하고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애련의 사랑은 결국 동석 자체를 사랑한 것이기 보다 '자신 안에 있는 동석'을 사랑한 것임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애련 역을 맡은 이미연은 "애련의 사랑이 부러워 이 영화를 선택했다"는 고백처럼, 부러운 그 사랑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녹녹히 배어있다. 반면 동석 역을 맡은 신인 배우 최우제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줬던 그 복잡다단한 표정연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물고기자리>가 영화 속 애련이 운영하는 비디오 숍의 이름(Sad Movie)처럼 '슬픈 영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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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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