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 태지]'83분', 서태지와의 아주 특별한 만남

  • 입력 2000년 9월 30일 13시 15분


2000년 9월29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양군 기획' 사무실에서 서태지를 만났다. 그는 기자에게 "5년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이네요"라는 말을 던지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빨간 운동화 차림의 그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안정돼 보였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다음은 83분 동안 그와 나누었던 대화다.

▼ 6집(솔로 2집)을 발표한 지 한달이 돼 가는데 현재 심경은 어떤가요?

- 잠도 푹 자고 아주 편안해요. 공연을 하고 나도 힘이 넘쳐요. 오랜 기간 재충전을 하고 와서 그런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보다 기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 컴백하기 전 '결혼설' '국내 잠입설' 등 각종 루머가 쏟아졌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그리고 각종 매체와 평론에서 '메시아가 온 것 같다'는 등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아는 사람을 통해 모든 소식을 다 전해들었어요. '100% 작문'이라 웃음만 나오더군요. 은퇴를 한 상황이어서 해명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를 메시아로 표현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요. 음악인으로 보여지고 싶은데 아쉽네요.

▼ 서태지씨가 은퇴를 선언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게 사실입니다. 언제부터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게 됐나요?

- 떠날 당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4집 활동을 하면서 다음 앨범에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자신이 없었어요. '못 이길 바에는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죠. 심신이 지쳤고 열정이 퇴색하면서 스스로 끝낸 셈이죠.

1년 동안 푹 쉰 다음 재미 삼아 음악을 다시 시작했고 노래가 쉽게 만들어졌어요. 미국 본토의 선진 음악을 바로 접하면서 솔로 1집을 완성했구요. 그 당시는 한국에 갈 생각이 없었고 어떻게 내 음악을 알리겠다는 구상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보여줄 부분이 많았고 자신감이 생겨 활동을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 '난 알아요'부터 '하여가' '교실이데아' '필승''take2' '울트라맨이야'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음악은 록을 중심으로 한 변화의 연속이었습니다. '항상 새로워야 한다'라는 부담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 부담을 갖지는 않아요. '못해내면 못견디는' 제 성격 때문일 거에요. 정통성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제 취향은 여러 가지를 접목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음악의 중심은 '록과 힙합'입니다. 제 음악을 듣고 다른 앞서가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 서태지 씨가 귀국한 뒤의 행보를 두고 '신비주의를 통한 상업적 전략'이라는 등 돈과 관련한 얘기가 무성했는데요.

- 진짜 돈벌려면 인터넷 사업을 해야죠. 지금까지 CF 등에 출연한 것은 음악과 관련된 것일 뿐입니다. 제대로 된 음악을 위해서라면 악착같이 돈을 벌 겁니다. 솔로 1집 당시 20억 계약건만 해도 제가 가져가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만약 그 돈을 헤프게 쓴다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 은퇴 후 솔로1, 2집에서 선보인 것 외에 노래를 얼마나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 항간에 100곡 이상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완전 낭설이에요. 물론 습작 형식으로 만든 것은 있지만 노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수준입니다. 1장의 앨범에 보통 7곡을 수록한다고 하면 14곡 정도 만들기는 합니다.

▼ 이제 이번 앨범의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해보죠. '탱크'에 나오는 중간부의 기타 연주가 거문고를 뜯는 듯 한 느낌이 들었는데 의도한 바가 있었나요?

- 특별히 국악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쇳소리가 나는 듯한 연주는 다른 그룹도 그렇게 시도한 적이 있었고 새로운 톤으로 가려고 했었어요.

▼ 연주곡 '표절'은 기존에 있는 샘플 CD를 그대로 옮겨왔는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 제 음악을 두고 '베꼈다'거나 '새로울 게 없다'는 등의 이야기에 대해 '이런 게 표절'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 이번 음반 마지막 트랙에 리메이크한 '너에게'(93)를 선보인 것은 옛날 사운드로 돌아올 가능성으로 봐도 될까요?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이고 핌프록 분위기로 불러도 어울릴 것 같아 다시 부른 것 뿐이에요. 지난 시간 팬들과 공유했던 감정을 다시 느껴본 것이라고나 할까요.

▼ 이번 앨범에서 스크레치를 맡은 '바부'와 최근 공연에 참여하고 있는 드럼 주자 '헤프'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죠.

- 두 사람 모두 소개로 알게 됐어요. 바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름이 알려진 DJ구요. 헤프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볼트 오브 라이트'라는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는 뮤지션입니다. '키드 록' 공연 당시 오프닝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 기자회견 당시 '이번 앨범이 최고'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뭔가요? 또 자신이 만든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는 어떤 곡인가요?

- 데뷔시절부터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발전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6집이 노래 연주 편곡 등 모든 부분에서 최고구요. 전곡이 애정이 가지만 그래도 '탱크'와 'ㄱ 나니'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어요.

▼ 솔로 2집에 대한 평가가 분분한데요?

-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음악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 평론 쪽에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드롬이나 우상화를 얘기하다가 상업화를 운운하는 언론 역시 천차만별인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 스스로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되기도 하더군요.

▼ 그래도 서태지씨를 문화적 상징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요.

- 자의는 아닌데 그렇게 돼버린 것이죠. 전 그냥 음악으로 팬들과 교감하는 뮤지션이길 바랍니다.

서태지는 창법을 바꾸기 위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기 연습을 했으며 가사를 쓰기는 쉽지만 랩의 경우는 '고난 그 자체'였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음악에 맞는 소리를 찾기 위해 그는 4년7개월이 외롭거나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치열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 최근 미국 인디 레이블에서는 '디 알루미늄' '밴 앤 제이슨' 등 포크 사운드가 가미된 '챔버 록'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 그 음악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미국 언더 음악은 잘 몰라요. 대신 미국에서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어요. '메탈리카' '콘' '판테라' 등 록 뮤지션들의 콘서트였어요. 특히 '머틀리 크루' 공연장에서는 아저씨 팬들이 많아 인상 깊었습니다.

▼ 미국에서 가장 많이 들었거나 추천하고픈 뮤지션의 음반을 소개한다면?

- '콘'과 '림프 비스킷'의 음반은 모두 추천하고 싶구요. '데프턴스' '슬립 낫' '코어 챔버'의 음악도 감상해볼 만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 서태지씨가 부재했던 가요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최근 조성모, H.O.T, GOD 등 신세대 스타들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또 후배 뮤지션 중에 음악적으로 관심이 있는 가수는 누구인가요?

- 미국에서 한국 가요계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고 요즘 스타들에 대한 멘트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 언더 음악은 거의 다 구입해 들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은퇴한 뒤 그런 뮤지션들이 더 많아져 기뻤습니다.

▼ 서태지 씨를 '장르의 전도사' 혹은 '대중을 이끄는 아티스트'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나요?

- 결과론적으로 보면 수긍은 돼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빨리 소개한 것뿐입니다. 다양한 음악을 접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악영향을 미칠지 도움이 될지는 나중에 평가가 나겠죠.

▼ 9월25일 MBC '음악캠프' 사전녹화 때 언론을 상징하는 대형 패널에 빨간 페인트를 뿌렸는데 이런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 단순한 퍼모먼스로 봐주세요. 그동안 저를 비판한 글들을 신문 형식으로 옮겨서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공백기에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상업적 전략'이라고 말한 부분은 이해가 잘 안되더군요.

▼ 인디 밴드를 중심으로 한 '안티 서태지'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부 언더그라운드에서 불거진 일이라고 보구요.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 그 동안 발표했던 음반이 30분 내외임을 지적한 평론가도 있는데요.

- 제 취향입니다. '자식이 많으면 정신이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엑기스 만 추리려고 한 것입니다. 짧은 것은 미안하지만 그냥 최선의 노력을 다한 저를 인정해 주셨으면 해요. 완성된 결과물이 좋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 미국에 머물 당시 음악 외에 인터넷 서핑이나 장난감 수집 같은 취미생활을 했었나요?

- 그럼요. 한국 사람을 한 명도 만날 수 없는 외지에서 장난감 조립하구 모형 모으는 일은 유일한 위안거리였어요. 인터넷도 많이 돌아다녔죠. 모든 사이트를 밝힐 수는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한국 뉴스 사이트를 켜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접하곤 했어요.

▼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겠네요.

- 미국 사람도 거의 만나질 않아서 별로 실력이 늘지는 않았어요. '얼마냐' '어디냐' 정도를 말할 수 있는 '생활회화' 수준입니다.

▼ 혹시 영화음악에 관심은 없나요?. 만약 하고 싶다면 어떤 영화를 하고 싶나요?

- 관심은 많은데 능력이 부족해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약 한다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어드벤쳐 류의 영화음악을 하고 싶어요. 영상에 맞는 박진감 넘치는 음악이죠. 미국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5번이나 극장에서 봤는데 정말 사운드가 좋았어요.

▼ 서태지 씨는 '듣는 귀'가 탁월하는 평을 듣고 있는데요.

- 부족해요(웃음). 이번 앨범의 기타 톤을 잡는 데만 두달이 걸릴 정도로 힘들었어요. 풍부하고 좋은 톤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선진국의 프로듀서나 엔지니어에게 더 많이 배워야죠.

▼ 대규모 및 클럽 공연을 펼친다고 했는데 어떤 내용을 담나요?

- 11월 중순부터 한달 동안 힙합 펑크록 핌프록 언더그룹 4팀과 함께 공연에 나설 계획이에요. 오프닝과 중간 엔딩을 맡길 생각이고 방송할 때 이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아직 오디션 중이어서 결정은 안된 상태지만 최대한 지방까지 순회할 거예요.

대규모 체육관 공연에서는 뮤직 비디오 등 비주얼한 부분을 보여드릴 거구요. 1000석 이하 공연장은 클럽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꾸밀겁니다. 음향 장비를 최고급으로 들여와 '본전 장사'만 해도 다행일 것 같아요.

▼ 해외진출을 고려하겠다고 했는데 그 나라 언어를 하지 않으면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진출할 계획인가요?

-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닥을 잡고 있습니다. 영어로 노래를 부를 거구요. 문제는 음악의 질이죠.

▼ 음반사 '괴수대백과'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요?

- 지금 구체적인 계획은 없구요. 지켜봐 주세요. 막연히 언더 뮤지션의 음악을 만드는 제작자가 되고 싶진 않아요. 언더 뮤지션에 대한 애정은 많지만 음악이 준비됐다면 이들을 그대로 알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에요.

서태지는 배고픈 언더 뮤지션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화가 난다'고 했다. 비슷한 음악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수십억대 스타'고 다른 이는 '배가 고픈'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여러 명의 언더 뮤지션을 만나 "너의 음악은 대단해. 노력하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괴수대백과사전'이라는 음반사를 만든 것도 서태지의 '언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전초기지인 셈이다.

▼ 이번 음반이 얼마나 팔릴것 같나요?

- 지금 130만장 정도 나갔다고 들었는데 많이 나가면 물론 좋죠(웃음). 하지만 솔직히 너무 많이 팔고 싶지도 않아요. '국민 가수'가 되는건 원치 않기 때문이죠. 제 음악을 진중하게 들어주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사주길 바랍니다.

▼ 팬들이 서태지 씨를 만나기 위해 며칠밤을 새거나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는 데 미안하지는 않나요?

- 저도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위해 밤을 새라면 샙니다.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는 것은 안되겠지만 그 정도의 열정은 있어도 무방하죠. 다만 제 얼굴을 보기 위해 만나달라는 요구는 일부러 피하고 있어요. 팬들과의 모임을 갖지 않는 것은 제 음악 만 보아달라는 의도에서 입니다.

▼ 서태지씨의 장기적인 꿈은 뭐죠?

-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거요. 프로듀서가 되고 싶지도 않고 사업가는 더더욱 싫구요. 후배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 정도겠죠.

▼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습니다. 다시 뭉칠 가능성은 있나요?

- 저도 그리워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다들 서로의 길이 따로 있으니까요.

▼ 미국에는 언제 가나요?

- 공연 후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나면 내년 초나 될 것 같아요. 음악 작업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미국에 가는 것을 편하게 봐주셨으면 해요. 이젠 은퇴가수가 아니니까 한국에도 자주 찾아올 거에요.

그는 양현석과의 재회가 '행운'이라고 했다. 다른 기획사였으면 그를 이해해주지 못했을 것이고 음반 발표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각별한 고마움을 전했다.

29살 된 이 청년은 시종일관 당당했고 과거와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럼이 없어 보였다. 악수를 나누며 기자에게 그는 "활동 말미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83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서태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초롱초롱한 그 눈망울이.

황태훈 <동아닷컴 기자>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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