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에밀 졸라

  • 입력 2000년 9월 28일 15시 02분


▽에밀졸라(The Life of Emile Zola, 1937, Warner Brothers)▽

감독: William Dieterle 아카데미 작품상,

출연: Paul Muni (Zola 역)

"모든 사람에게는 조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의 프랑스 혁명 예찬론이다. 그의 수사는 프랑스 국민에 대한 찬사와 격려이지 세계 모든 인민에 대한 다짐이다. 자유, 평등 박애, 빨강, 파랑, 하양의 삼색기에 담긴 위대한 공화주의 혁명정신은 프랑스가 세계인에게 물려준 인류의 공동유산이자 보편적 가치임을 선언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에밀 졸라의 일생』은 다시 한 번 제퍼슨의 수사를 확인하는 작품이다. "나는 고발한다."(J'accuse)." 역사에 길이 남은 이 한마디는 프랑의 작가 에밀 졸라가 입에서 나왔다. 그의 고발장을 통해 전 세계에 거대한 파문이 일게 된 "드레퓌스 사건"은 작게는 무고한 한 사람의 신원(伸寃)을 위한 양심의 투쟁이었지만, 크게는 프랑스 국민 전체가 혁명이 성취한 공화주의의 전통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장대한 드라마인 것이다.

아카데미 작품상과 전기 영화의 명배우, 폴 무니(Paul Muni)의 예기(藝技)가 빛나는 이 작품은 졸라의 '고발'이 이룩한 사회적 성과를 조명한 명작이다. 1862년, 궁벽한 청년작가 졸라는 화가 세잔느와 함께 파리의 빈민 아파트에서 불만의 세월을 죽인다. 실로 어렵사리, 난생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인 서점 점원 자리마저 버리게 된다. 정부를 비판하는 불온한 글을 계속 쓰면 처벌하겠다는 경찰의 경고를 전달한 주인의 서푼짜리 동정은 심사가 뒤틀린 자존심 강한 문제아 청년에게는 모욕이나 진배없었다. 무료한 불만의 세월을 보내며 하층민의 생활을 눈여겨본 졸라는 우연히 알게 된 파리 창녀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펴낸다. 전 유럽에 충격의 파문을 던진『나나』(Nana)의 탄생이다. 열 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후 파리의 진흙탕 속에서 청춘을 늑삭(勒削)당한 늙은 창녀의 이야기,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막장을 향해 추락하는 여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일기장을 재료로 삼아 구워낸 이 소설은 짐짓 위선의 가면의 쓰고 사는 파리의 신사, 귀부인들의 은밀한 기호를 자극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나나」로 인해 졸라는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음란물의 작가'로 낙인찍혔지만 그의 필명은 치솟고 군대의 비리, 광부의 참상 등 프랑스 사회의 치부를 고발하는 문제작들을 연속적으로 써내어 드디어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정작 어두운 세계를 고발하는 작가 자신은 그 폭로의 대가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아내 알렉산드린과 함께 호사스런 가구로 장식한 고급 주택에서 각종 기호품을 즐기는 졸부로 전락한다. 육신이 편안해지니 이제 세상을 위한 발언을 금하고 산다는 옛친구 세잔느의 비난에 속이 상한다.

세잔느는 여전히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시퍼런 정의감이 살아 있다. 세잔느는 구제가망이 전혀 없는 졸라에게 친구로서의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자신은 탐욕과 타락의 악취로 구토가 이는 허영의 도시 ,파리를 떠나 인간의 냄새를 찾아 낙향하겠다고 한다. 자리 잡으면 편지하라는 친구의 의례적인 인사에 대한 그의 답은 단호하다.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어. 그러나 기억하겠어." 뼈가 시리던 그 다락방에서 온갖 "위선의 종이" (책)를 불쏘시개로 삼던 그 시절을 상기시켜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졸라의 부탁에 세잔느는 냉담하게 내뱉는다. "아냐, 자네는 이미 그 세계로 되돌아 올 수 없다네. 잘있게나."

1894년, 프랑스 장교 에스떼라지 소령은 프랑스군의 비밀을 기록한 "명세서"(bordereau)를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으로 보낸다. 그러나 어떤 경로인지 알 수 없지만 ( 필시 이중첩자에 의해) 문서는 다시 프랑스군 사령부로 되돌아온다. 군 수뇌부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고 범인 색출 작업이 진행된다. 진범 에스떼라지는 무사히 수사를 통과하고 대신 드레퓌스가 혐의자로 체포된다. 에스떼라지가 독일계 혈통의 소유자였지만, 그보다도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감히 유대인 주제에 위대한 프랑스 군대의 장교가 되었다는 사실이 신경에 거슬린 것이다.

그러나 드레퓌스가 혐의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명세서의 필적이 그의 것으로 단정할만한 확증이 없다. 참모부는 곤경에 처한다. 이때 극단적인 반 유대 신문, 『라 리브르 빠롤르』지가 드레퓌스의 체포 사실을 터뜨리면서 참모본부가 마치 '매국노'를 비호하여 기소를 주저한다고 비판한다. 보수 언론 세력이 이에 동참하고 나서자 유사필적을 유일한 증거로 삼아 군은 드레퓌스를 반역죄로 기소한다. 비밀리에 속성 군사재판이 열리고 드레퓌스는 종신 금고형에 선고된다. 이어서 군은 드레퓌스에게 불명예 전역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에 소재한 '악마의 섬'에 유배한다.

그로부터 1년 후 정보국에 부임한 피카르(Picquart) 중령이 에스떼라지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상관에게 보고하나 참모부는 묵살한다. 오히려 피카르를 아프리카로 전출시킨다. 위대한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는 치욕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환을 대비한 작전으로 에스떼라지에 대한 재판을 열고 무죄를 선고한다.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는 남편의 오명을 벗겨달라며 필명 높은 졸라를 찾아온다. 이미 물질적 풍요와 안정된 생활에 길들여진 졸라는 망설인다. 머지 않아 프랑스 학술원( Acamedie Francois)의 정회원이 될 것이 목전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드레퓌스의 기록을 보고, 특히 세잔느의 자화상을 보고 나서 감연히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글이 탄생한 것이다. 1898년 1월 31일 자 로로르( L'aurore) 지에 실린 이 글은 대통령에 대한 공개서한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과 이를 은폐한 군부의 음모를 천하에 공포하는 내용이다. 이 글로 인해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된다. 졸라가 가는 곳마다 유죄를 선언하고 처단을 요구하는 광분한 군중의 폭동에 시달린다. 영화는 졸라의 재판 장면을 상세하게 그린다. 재판장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금지한다. 피카르가 진실을 증언하려하나 청중과 군 수뇌부가 제지한다. 에스테라지의 심문도 재판장은 금지한다. 예상대로 애국심에 불타는 배심은 졸라는 유죄판결을 받고 영국 망명의 길에 나선다. 때로는 일시적 비겁함이 보다 큰 용기라는 주위의 충고를 받아들여 런던의 혹한을 감내한다.

법정 장면은 물론 사실을 극화시킨 것이다. 실제재판에서는 배심을 상대로 한 졸라의 최후진술은 없었다. 영화 속의 진술은 " 나는 고발한다"에서 따 온 것이다. 졸라의 망명 중에 진행된 항소심은 기술적인 이유로 졸라의 유죄를 번복한다. 즉 기소한 원고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원심에서 전쟁장관이 졸라를 기소했는데, 그는 기소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졸라의 글로 명예가 훼손 당한 사람은 에스떼라지가 멩세서의 저자가 아니라고 무죄 방면한 재판관들이고 따라서 이들만이 명예훼손의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졸라 사건에 대한 재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졸라는 영국 체류 18개월만에 (런던의 겨울은 한 번으로 족했다) 파리로 돌아왔고 1902년 독극물 사고로 죽었다. 정치적 암살의 가능성이 풍문이 자자한 가운데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8년 이장하여 국립영웅의 전당에 안치되었다.

드레퓌스도 결국 진실을 밝힐 기회를 얻었다. 암울했던 시절 이 땅에 한 줄기 찬연한 섬광을 남겨주고 떠난 우리 시대의 법률가, 조영래의 말대로 "진실은 영원히 감추어 둘 수 없는 법이다. 프랑스 전체가 드레퓌스에게 재심을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하게 싸운다. 국민 전체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드레퓌스에게 재심을 허용해야 한다는 재심 요구파와 이에 반대하는 재심반대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재심 요구파에는 아나똘 프랑스, 클레망소 등 진보파 자유주의자와 지식인이 주동이었고 재심반대파에는 왕당파, 반 유대파, 카톨릭 교도, 국수주의자, 군인 등이 주동이었다.

마침내 세계 여론에 굴복한 정부는 재심의 기회를 준다. 1899년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에서 귀환한다. 참혹한 유형생활 끝에 이미 백발의 노인 모습이 역력했으나 실제 나이는 서른 아홉에 불과했다. 황급히 비밀리에 열렸던 첫 번 째 재판과는 달리 이번에는 전세계에서 쇄도한 수 백명의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공개법정에서 열린다. 이미 그의 무고함이 공지의 사실이 되었는데도 군부의 교활하고도 집요한 공작이 성공하여 다시 유죄선고가 내려진다.

이 재판에서 감정증인으로 등장한 Bertillon은 두개골의 사이즈를 재어 생래범죄인을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롬브로조 (Lombroso)의 『천재론』을 典範으 로 삼는 소위 '신파'(新派)이론이다. (영화는 드레퓌스 재판 장면을 다루지 않는다.) 또한 그는 전문적인 필적감정인으로 행세하면서 드레퓌스야말로 명세서의 진정한 저자라고 증언했다. 다시 한번 유죄판결과 10년 징역이 선고되자 국제적 여론이 비등했다. 아나똘 프랑스와 졸라는 물론 미국의 데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도 판결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마침내 열흘 후에 프랑스대통령은 드레퓌스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졸라의 사후에도 드레퓌스의 끈질긴 재심투쟁은 계속되었고 끝에 1906년 마침내 무죄의 판결을 받고 군에 복귀했다. (영화는 1902년 졸라의 장례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1902년 몽마르트르에서 거행된 졸라의 장례식에도 물론 참석했고 1908년 졸라를 빵테옹에 안장하는 의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길에 극우파 테러범의 저격을 받아 가벼운 총상을 받았다. 군 생활을 계속한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하였고 퇴역 후에 조용하게 여생을 보낸 뒤 1935년 파리에서 75세로 일기를 마쳤다.

드레퓌스 사건과 졸라의 고발은 역사가 요구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지식인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귀감이다. 동료 문인, 아나똘 프랑스의 추도사가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그의 양심이 인간의 양심이 된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이제 비로소 프랑스는 정의와 이성의 나라가 되었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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