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 살아있다]위니 더 푸우 "천하태평 곰돌이"

  • 입력 2000년 9월 15일 18시 31분


곰돌이 푸우
곰돌이 푸우
저는 위니 더 푸우예요. 볼록 나온 배를 내밀고 뒤뚱뒤뚱 걸어다니는 귀여운 곰인형 아시죠? 토끼굴에 끼여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돼도 아무 걱정 없는, 천하태평 곰돌이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태평스러울 수 있느냐고요? 제가 사는 숲속 마을이 원래 그렇거든요. 걱정거리도 금세 재미있는 놀이로 바뀐답니다. 일 주일 이상 토끼굴에 끼여 있어야 했던 때에도, 저는 즉흥시를 흥얼거리고, 토끼는 굴 안에 있는 제 뒷다리를 수건걸이로 쓰고, 크리스토퍼 로빈은 제 앞에 앉아 책을 읽어주었는걸요. 바라는 일은 곧 이루어지고, 어려움과 난관은 아주 쉽게 해결되고, 악인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즐거움과 평화가 넘치는 마을. 정말 낙원 같은 세상이죠?

그렇습니다. 제 이야기는 ‘잃어 버린 파라다이스’ 이야기예요. 1926년에 나온 제 이야기는, 1차 세계대전 후유증에 시달리던 영국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어요. 작가인 밀른 아저씨는 학교 갈 나이가 된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을 위해서 썼다는군요. 어린 시절을 유난히 즐겁고 자유롭게 보냈던 아저씨는, 역시 그렇게 키운 아들이 이제 힘겨운 어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게 안타까웠던 거예요. 학교든 전쟁이든, 살다 보면 내 뜻과 상관 없이 힘든 고비를 넘어야 하는 때가 있죠. 그럴 때 돌이켜 추억할 수 있는 낙원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제 이야기는 영국문학 사상 가장 천진난만하고, 단순하고, 재치있고, 재미있는 동물 이야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구성이 허술하다, 일관성이 없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하나도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요. 하지만 제 이야기에서 숨은 뜻이나 깊은 의미를 찾으려 들지 마세요. 그냥 경쾌하고 귀여운 유머와 천연덕스러운 낙천성만 즐기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도 굳이 뭘 건지고 싶으시다면 이건 어때요? 저는 아주 겸손하지요. ‘두뇌라고는 하나도 없는’ 곰인형인 걸 잘 아니까요. 꼬마돼지 피글렛은 자기가 겁쟁이라는 사실이 괴롭지만, 용감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아요. 당나귀 이요는 늘 우울하고 되는 일 하나도 없지만, 친구들의 보살핌으로 곤경에서 벗어나고 기분이 나아져요. 호랑이 티거는 큰소리를 땅땅 치는데, 그렇다고 친구들을 얕잡아보는 건 아녜요. 우리는 스스로가 멍청이, 겁쟁이, 허풍선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서로를 아껴 주고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아요. 오히려 서로를 도와 주고 감싸게 만들지요. 이 정도면 낙원에서 살 자격이 있는 게 아닌가요?

김서정(동화작가·공주영상정보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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