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은영/정치자금 세탁부터 막아라

  • 입력 2000년 9월 7일 18시 27분


가을 정기국회에는 자금세탁방지법안이 적어도 두 종류 이상 제출될 예정이다. 38개 시민단체는 6일 ‘부패방지입법 시민연대’를 결성하고 같은 날 그동안 검토해온 자금세탁방지법안(시민연대안)을 국회에 정식으로 입법청원했다. 곧 이어 정부와 민주당이 공동으로 마련한 법안도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돈세탁 총액은 년간 54조원 내지 169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한국형사정책연구소, 90년대 한국의 돈세탁 분석 ) 음성자금 문제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돈세탁이란 음성적으로 조성된 범죄수익을 합법적인 자금으로 전환하는 모든 과정을 말한다. 음성자금의 상당 부분은 뇌물이나 떳떳치 못한 정치자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돈세탁에 관한 금지 규정이 아직 없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은닉하거나 깨끗한 돈처럼 위장해서 사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행과 같은 금융실명제 아래에서 자금세탁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는 금융기관직원의 묵인 내지 방조 하에서 이뤄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표로 입금하면서 현금으로 입금한 것처럼 처리해 주는 수법도 있고 A의 계좌에 있는 돈을 B의 계좌에 넣으면서 서로 단절된 현금 출금 및 현금 입금이 이뤄진 것처럼 꾸며 상호연결을 끊는 수법도 사용될 수 있다. 돈세탁을 막기 위해서는 법 제정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 직원의 도덕성도 필요하다.

자금세탁방지법(안)은 음성자금의 흐름을 막고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제도로서 부패방지법(안)과 별도의 법률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시민연대 법안에서는 금융기관에서 2000만원 이상의 현금거래가 이뤄질 경우 금융기관이 이를 30일 이내에 국세청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다. 금융기관이 국세청에 통보하지 않은 경우에는 징역형이나 벌금형까지 부과하게 될 것이다. 정부안에서는 2000만원보다 훨씬 고액거래의 경우에만 국세청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들리는 얘기로는 국회에서는 아예 국세청에의 통보의무를 없애고 금융기관이 고액 현금거래에 관한 기록을 5년간 보존하는 것으로 충분하도록 후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법에서는 1만달러 이상의 금융거래는 의무적으로 국세청에 신고하도록 돼 있고 돈세탁 수익 자체도 몰수토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정부가 마련하고 있는 자금세탁방지법(안)에는 정치자금이 적용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한다. 재정경제부는 내년에 있을 제2단계 외환자유화를 앞두고 불법자금의 유출입을 막기 위해 반드시 자금세탁방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치자금 부분은 이번 입법에서 제외시킨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정치자금 세탁 문제만은 규제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원들과 깨끗한 정치풍토를 위해서 정치자금 세탁도 규제해야 된다는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정부패가 가장 심한 곳이 정치권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부정한 자금의 흐름을 막기 위해 자금세탁방지법을 제정하면서 가장 규제의 필요성이 높은 정치자금을 제외한다면 그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법이 부패방지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부정한 정치자금의 세탁부터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정치자금세탁방지법을 동시에 제출하지 않는 한 자금세탁 중에서 유독 정치자금만을 예외로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선진국들은 부패방지 첨단기법으로 ‘내부비리 제보시스템’과 ‘돈세탁 방지시스템’ 두 가지를 채택하고 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자금세탁방지법이 통과됨으로써 우리나라가 국제범죄자금의 세탁소라는 오명도 씻고, 우리사회의 부패를 차단할 수 있는 정화시스템도 갖추게 되기를 바란다.

음성자금의 세탁을 막기 위해서는 고액 금융거래에 관한 국세청 통보가 반드시 의무화돼야 한다. 그리고 행여 정치자금에 대해서만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예외 규정을 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은영(한국외대 법대학장·부패방지입법 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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