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인숙/물난리 또 당해야만 합니까

  • 입력 2000년 8월 27일 18시 31분


몇 년 전에 잠깐 다른 나라에서 체류하고 있을 때, 한 세기만에 처음이라는 큰불을 본 적이 있었다. 불은 도시의 외곽을 포위한 채 한달 동안이나 계속 타올랐다. 숲을 태우는 화염은 아파트의 베란다에서도 바라 볼 수 있었다. 잠깐 외출하러 나갈 때면 도심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곳곳에 쳐 있는 바리케이드와 그 가까운 데에서 활활 솟구치는 불꽃을 볼 수가 있었다. 천재를 막는 사람들의 노력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자 하는 순정의 극치에 있었지만, 그러나 미미해 보였다. 불은, 자신이 멈추고 싶을 때까지 계속 숲의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다니며 타올랐다.

어린 시절의 오래된 물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불인가, 물인가.

큰물의 재난에 대한 경험은,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내 기억 어느 곳에나 있다. 해마다 TV는 범람하는 하천을 보여주고, 완전히 물에 잠겨 흔적만 남은, 그래서 그 붉은빛이나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꼬리가 돌돌 말린 돼지새끼가 오도카니 앉아있는 것을 보여주곤 했다. 때로는 가까운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여름도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잠겨버릴지도 모르니 당장 라면이나 부탄가스를 사놓으라는 전화였다.

쏟아져 내리는 폭우는 장엄하고, 경외스럽고, 가혹했다. 내 집이 잠기지 않는 한 나는 빗방울 하나 어깨에 묻히지 않은 채, 화면만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비는 어쨌든 멈출 것이고, TV에서는 천재가 아닌 인재에 대해서 어김없이 비난할 것이고, 수해 현장의 복구를 돕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이을 것이고, 그리고 수재의연금의 모금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것이 거의 어김이 없다. 사방이 다 물에 잠긴 지붕 위에 홀로 앉아 있던 돼지새끼의 절망이나, 그 집과 돼지와 논과 밭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주인의 절망을 오래 기억하고 있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같은 계절이 오면, 또 다시 반복되는 일일 뿐이다.

자연의 뜻이 아무리 장엄하다고 하더라도, 하늘을 보며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 사실 그런 일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바도 없진 않지만, 그건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일 뿐일 것이다. 계절이 되면 계절의 법칙대로 내리는 비나, 혹은 견디지 못할 힘으로 일어나는 산불이나,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앙이 아니라 순리일 뿐이다. 재난 이후, 아낌없이 성금을 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런 순리가 같이 들어있지 않나 싶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라보거나, 일을 당하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만드는 것은 ‘인재’라는 소리다. 한번 무너졌던 둑이 또 다시 무너지고, 한번 범람했던 하천이 또 다시 범람하고, 무너졌던 다리의 옆다리가 또 무너지고, 불이 났던 옆 도시의 산에서 또 다시 불이 난다. 이미 저질러진 인재보다, 더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반복되는, 그것도 어김없이 똑같이 반복되는 인재다.

마침내 사람들은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까지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재앙의 교훈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올 여름 내내 비가 적어서 가뭄 걱정은 있었지만 그래도 큰비의 피해는 없었으니, 순하게 계절이 넘어가나 싶었다. 종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잔 마시는 그리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했다.

그러나 여름 끝 무렵에 밤새 내린 거친 빗소리를 들으며 깨어난 아침, 나는 불길하게 커튼을 연다. 내 집이 잠길까봐 하는 걱정은 아니다. 내 가까운 지인 중의 누구도 비 때문에 큰 피해를 당할 곳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가, 저 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마냥 편치는 않다.

자연은 자연이 할 몫을 다 할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가혹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의 몫인 바 어쩔 수가 없으리라. 다만 사람도 사람이 할 몫을 다 한다면, 그 가혹함을 견디는데 좀 더 힘이 되련만….

김인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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