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美人'-순백의 화면처럼 공허한 '몸의 대화'

  • 입력 2000년 8월 10일 18시 55분


여균동감독의 새 영화 ‘美人(미인)’은 재미야 어쨌든 무척 세련된 영화로 다가온다. 순백의 화면, 싯귀처럼 흐르는 독백, 고급스런 피아노 반주에 실린 배우들의 몸놀림. 하지만 이 영화는 몸의 감수성에 충실하기에는 너무 관념적이고 육체적 솔직함에 다가서기에는 너무 사치스럽다.

남자는 책읽기를 즐기는 인터뷰 잡지사 기자. 여자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누드모델. 남자는 인터뷰를 통해 만난 여자의 육체에 탐닉하고 그의 집에 둥지를 튼 여자는 휴대전화 벨소리만 울리면 들뜬 바람처럼 사라진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의 집에 머무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일말의 자존심까지 던져 옛사랑에 매달리던 그녀가 온몸이 멍투성이로 나타나고 남자는 그녀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파국을 향해 돌진한다.

이 영화는 우선 욕설과 외설적 표현이 난무하던 여균동 감독의 영화가 맞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트와 화면이 고급스럽다. 영화 장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자의 창넓은 아파트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인테리어로 무장돼있고 순백색으로 가득찬 화면은 전신 누드도 마다않는 남녀배우의 거친 몸짓을 필름속으로 살폿이 눌러준다.

만년 소녀같던 노영심의 ‘벌거벗은’ 피아노 반주는 조지 윈스턴의 취향을 풍기고 성애장면에서 근육의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담아냈다는 안무가 안은미의 몸연출은 최소한 감독의 전작들에서 풍기던 퀴퀴한 여관냄새는 떨어냈다.

하지만 정작 몸의 미학을 펼쳐야 할 오지호와 이지현 두 남녀배우의 연기에는 땀냄새가 없다. 파격적인 노출이 곧 흥분으로 연결될 수 없고 연기와 한몸이 되지않는 대사는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몸에 대한 이성의 항복선언문이고 정신에 대한 육체의 독립선언문을 표방했다. 하지만 정작 그 문장들은 몸짓이나 육체의 언어가 아니라 관념과 사색의 언어로 얼룩져 있다. 그래서 남자가 결국 여자를 죽이는 마지막 장면도 결국은 관념적 살인으로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와 달리 이 영화가 몸의 울림을 가져오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이유도 거기있다. 18세이상관람가. 12일 개봉.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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