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이회창총재의 '원칙'

  • 입력 2000년 8월 2일 18시 40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휴가를 다녀온 후 야성(野性)을 회복했다고 한다. 참으로 이상한 얘기다. 이 말대로라면 그동안은 야성이 없었다는 것인가. 야당총재가 야성이 없었다는 것은 소금에 짠맛이 없었다는 말인데….

엊그제 한나라당 총재단회의에서 이총재가 뭔가 각오를 새롭게 한 듯 “국민이 원하는 대로 국민을 향해 원칙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을 놓고 ‘야성회복’이란 말이 나온 것 같다. 이총재의 말을 더 들어보면 ‘야성회복’이란 기사가 나올 만하다. “어떤 정파와도 당리당략 정략에 따라 야합하지 않겠다.” “당과 나의 행동원칙은 오직 하나다. 원칙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총재의 이런 말들을 뒤집어 정리하면 이총재가 그동안 당리당략을 위해 다른 정파와 야합을 하려 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거나 원칙을 버렸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행보를 보인 게 아니냐고 되물어 볼 수 있다.

▼유권자 모독하는 말▼

이총재는 자타가 인정하는 원칙주의자이다. 그래서 이총재의 말은 또 원칙주의자가 한때나마 원칙을 접고 현실주의자들의 말에 너무 빠져있었지 않았느냐는 자기 반성의 소리로도 들린다.

현실주의자들은 말한다.

‘이총재는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게 큰 약점이니까 이걸 보완해야 돼. 그러려면 현실과 동떨어진 3김 청산 소리는 그만하고 JP도 만나고 YS도 찾아가야 돼. 광폭(廣幅)의 정치를 해야지. 자민련의 17석도 실체를 인정해야지. 언제까지 JP가 DJ쪽에 붙어있게 할 건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야당은 계속 DJ페이스에 밀리고만 있는 게 아닌가. 이래가지고 어떻게 2002년대선을 치르겠는가. 더구나 JP는 대북문제에 있어 보수적이니까 JP와 손잡으면 DJ의 질주에 제동을 걸 수도 있지 않겠나. 2002년 대선도 지난번처럼 지역대결이 될 테고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판가름날 텐데, 충청도 텃밭주인인 JP를 잡지 않고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JP의 마음을 사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 아닌가.’

특히 ‘차기 대통령은 JP마음을 잡는 사람이 된다’는 얘기는 자민련쪽에서 뿐만 아니라 YS도 퍼뜨리고 한나라당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유권자 입장에서는, 특히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모욕적이다. 우선 이 말은 다음 대선도 지역감정에 의한 편가르기로 결판이 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충청권의 JP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충청도 사람들은 대통령 후보를 고를 때 정책이나 인물됨됨이, 어느 정당 소속이냐를 기준으로 독자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JP가 손짓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는 얘기가 된다. 각자 주견도 없이 지역바람 JP바람에 휩쓸려 투표를 한다는 말이다. 대단히 기분 나쁜 가상이다.

▼‘국민이 원하는 대로’▼

여하튼 이총재로서는 무슨 정치적 계산이 있어서건, 그저 사람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만날 수 있다는 순수한 마음에서건, YS나 JP같은 정치 9단들을 만난 후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밀약설’이라는 고약한 소문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원칙주의자라는 자신의 특화된 브랜드를 지켜나가는 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술수로 하자면 수십년 그런 식의 정치에 닳고닳은 3김들의 수를 어떻게 당하겠나, 그들이 음해하고 모략하면 당하고 대신 국민만 보고 묵묵히 바른길을 가면 국민이 알아주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대개 이런 심정에서 ‘국민을 향해, 국민이 원하는 대로’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대선의 모습은 지난날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언제까지 지역구도에 의한 선거, 지역을 내세운 특정인의 깃발을 따라 몰려다니는 패거리 선거가 되풀이될 수는 없다. 이총재가 진정 3김식 구태정치를 청산하고 지역주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지도자라면 2002년 선거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선거가 되도록 리드해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분명한 원칙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과연 있는가.

우선 작은 것 같지만 중요한 문제를 하나 묻고 싶다. 김대중대통령이 앞장서 거액의 국민 혈세까지 지원해 서울 상암동에 세운다는 박정희기념관에 대해 이총재는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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