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避 暑(피서)

  • 입력 2000년 7월 23일 19시 17분


避―피할 피 暑―더울 서 程―과정 정 櫛―빗 즐 逸―빼어날 일 爵―벼슬 작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종종 접했던 해외소식이 있었다. 서양의 선진국에서 바캉스를 떠나는 사람들 때문에 避暑地는 온통 만원인 반면 도시는 텅 비어 적막하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그런 풍속도가 우리나라에도 나타난 지 이미 오래다. 이제는 누구나 자가용을 가지고 있어 路程(노정)의 遠近(원근)에 관계없이 마음만 먹으면 전국 어디라도 후딱 다녀올 수 있다. 길도 잘 닦여진데다 도처에 휴양시설이 櫛比(즐비)하여 휴식을 취하기도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여름철 더위가 시작되면 이른바 避暑를 가게 된다. 전에는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일상사가 되었으며 좀 더 여유있는 계층에서는 아예 외국으로 피서여행을 다녀올 정도까지 되었다. 일상에서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機會에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心身을 쉬게 한 뒤 다시 생활에 전념한다는 재충전의 의미가 강하다.

이렇듯 편리한 지금과는 달리 옛 사람들의 避暑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우선 날씨가 더워지면 身體的 機能이 저하되는 것은 물론 食慾까지 떨어져 허약해지기 쉽다. 그래서 무슨 방법이든 찾아 더위를 식혀야 했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나무 그늘을 찾는 것이었다.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 밑에 돗자리라도 깔고 배를 훤히 드러내고 큰 대(大)자로 누우면 만사가 귀찮아지면서 그저 한잠 푹 자고픈 생각밖에는 없다. 여기에다 바람이 솔솔 불어대고 나무 위 매미라도 울어주면 이건 自然 避暑法치고는 逸品이었다.

하지만 점잖은 身分에 벌렁 드러누울 수도 없었던 兩班들은 대청마루에 누워 竹夫人을 껴안고 자는 방법도 있다. 풀먹여 깔깔한 모시옷을 입고 죽부인 위에 다리 하나를 척 걸쳐놓으면 天國이 따로 없다. 더 높은 高官大爵(고관대작)들은 여기에다 하사받은 얼음까지 한 덩이 있으니 냉콩국의 맛도 逸品이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남정네들이나 할 수 있었다. ‘女子가…’라는 관념이 강하여 감히 흉내낼 수조차 없었던 이 땅의 불쌍한 아낙네들은 그저 부채를 흔들거나 머리를 감고 냉수에 간장 한 숟갈 풀어 마시는 게 고작이었으니 참으로 불평등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이제는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우위의 시대다. 避暑도 여성을 배려해가며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오랜만에 집안의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남자들이 도와야 한다. 21세기의 避暑 예절이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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