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목희/준비없는 개혁이 갈등 부른다

  • 입력 2000년 7월 23일 19시 03분


‘의약분업 대란(大亂)’에 이어 ‘금융개혁 소란(小亂)’이 지나갔다. 이들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와 주장이 줄을 잇는다. 집단이기주의를 나무라는가 하면 정부의 조정력 부족을 비판한다. 신뢰의 상실을 외치는가 하면 전문가 부재를 한탄한다.

그러나 “산은 높고, 하늘은 푸르고, 강물은 흐른다”는 말씀뿐이어서 허전하다. 갈등을 조정, 중재함으로써 대란을 막기 위한 구체화된 내용과 방법이 없다.

하반기에도 의약분업 완전 실현, 제2차 금융구조조정의 본격 추진,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강도 높은 진행, 근로시간단축을 쟁점으로 한 노사 노정간 대립 등 대란으로 갈 수 있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이익집단간 갈등을 매끄럽게 조정해가며 쉼없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책의 기획단계부터 철저한 사전준비가 전제돼야 한다. 정책의 국정철학과의 정합성, 정책 방향과 내용, 추진전략, 추진시스템 등을 망라한 ‘시나리오’가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시간표만 달랑 들고 5개 은행을 퇴출시키던 무모한 어리석음이 반복돼서는 안된다. 시나리오 없는 영화가 ‘명화’가 될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둘째, 정책당국자들이 21세기 패러다임에 맞춰 자신들의 자세를 확실하게 전환해 가야 한다. 정책당국은 정책기획 조정 집행 과정에서 정책 대상자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 그리고 사랑을 바탕에 지녀야 한다. 이들이야말로 신뢰의 근본이다. 신뢰가 있고 쌓여갈 때 대화와 타협, 설득과 양보는 시작되고 실현된다. 만일 복지정책당국자가 생활보호대상자들을 귀찮아하고 노동정책 당국자가 노조 간부들을 멀리 한다면 그 토대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날아본들 그 결과는 보나마나다.

셋째, 이익집단의 ‘속뜻’과 ‘겉주장’을 헤아리고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요청된다. 이해 당사자와의 성실한 대화를 열어 가는 줄기다. 거창하고 과도한, 때로는 과격한 겉주장을 벗겨 가면 그 속에는 집단 다수의, 혹은 양식 있는 소수의 소박한 또는 절박한 속뜻이 있다. 속뜻을 제대로 읽어내면 절반은 성공이다.

넷째, 파악된 속뜻의 양과 질을 조정해 우리 사회의 현실과 지향에 맞게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 노력은 대화와 토론, ‘설득과 압박’을 의미한다. 조정의 일관된 근거는 개혁의 국익과, 참여 효율 공평의 원칙이다. 이렇게 되면 대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도 소란으로 끝난다.

마지막으로 한참 늦은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갈등에 대비해 나가야 한다. 해결의 기본은 물론 앞의 내용들을 정부 내에서 ‘차분히 그러나 빨리빨리’ 채워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들이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시간이 흐르면 우리 모두는 죽고 없다.” 보이지 않는 손만을 고집하며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던 자유주의 학파에 맞섰던 케인스의 경구다. 무지무능과 무사안일이 널려 있는 우리 실정에서 깊이 새겨 봐야 할 명제다.

<권순택기자>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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