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읽기]정선 '통천문암도'

  • 입력 2000년 7월 18일 18시 37분


바다가 덮쳐 온다. 끝없이 넓고 깊은 동해 바다, 그 푸르고 차가운 물결이 천군만마(千軍萬馬)처럼 천둥소리를 앞세우며 밀려온다. 인간이 대체 무엇이랴? 세상에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장할 수 있으랴? 바다 앞에 서면 누구라도 왜소해진다. 그러나 맹자는 말했다.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던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반드시 물결부터 보는 것이다.”

강원도 통천 넓은 해변가에 깎아지른 두 절벽이 마주보고 솟구친 절경이 있다. 사람이 그 사이를 왕래하면 마치 문처럼 보여 문암(門岩)이라고 하는데, 지금 긴 지팡이를 끌며 한가로운 유람 길에 나선 늙은 선비가 막 지나치고 있다. 선비는 고개를 돌려 집채같은 파도가 일렁이며 쏟아내는 물보라를 돌아본다. 그런데 저 웅대한 파도를 보라! 뒤로 갈수록 점점 커지고 오히려 더 짙어지고 있다. 실경(實景)이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러나 누구라도 저 바닷가에 직접 서면 바다의 광대함에 압도되어 바로 이렇게 보고 느낄 수밖에 없다. 저 한량없이 크나큰 물, 그 위대한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맹자는 또 말했다. “해와 달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빼놓지 않고 비친다. 흐르는 물 역시 작은 웅덩이를 하나하나 다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군자가 올바른 도에 뜻을 둔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소한 몸가짐 하나부터 찬찬히 바루어 나가지 않고서는 이르지 못한다.”

그림 속의 선비는 이 글을 익히 외웠을 것이다. 물론 겸재 정선, 당대 ‘주역’의 최고 대가였던 화가 자신도 그랬으리라. 그랬기에 작가는 저토록 파도를 엄청나게 그려냈다. 덕을 하나하나 완성해 가지 않으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듯이, 온갖 역경을 거쳐 대양을 이룬 드넓은 바다의 위용을 그린 것이다.

정선은 잔 붓을 여러 자루 한데 묶어 휩쓸 듯이 호탕하게 파란(波瀾)을 그렸다. 굼실굼실 넘실대는 장쾌한 바다의 혼을 한꺼번에 지면 위에 쏟아내었다. 그 장대한 파동은 왼쪽 위 화제(畵題) 바로 아래 흐르는 구름에까지 영향을 주어, 부드럽게 굽이치는 중첩된 S자 곡선으로 그려졌다. 해천일색(海天一色). 온 우주가 한 흐름이다. 물가에 우뚝 선 암벽은 억겁 세월 속에 위쪽에 뻥 뚫린 구멍이 나 있고 그 속에 천년 노송이 뿌리 박고 서서 해풍에 머리를 씻긴다. 바위를 보니 굳센 뜻이 골수에 들었지만 표면은 오랜 세월에 눅어 오히려 부드럽다. 다시 바다가 덮쳐 온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 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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