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약국에 왜 약이 없나요"

  • 입력 2000년 7월 11일 19시 01분


11일 서울 연세대 앞 한 약국. 신촌 세브란스병원이 이날부터 원외처방전을 전면 발행하면서 환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 “왜 약이 없느냐”고 항의하는 환자들이 종종 목격됐다. 약국도 일부 약의 재고량이 금방 떨어지자 도매상에 연락, 퀵서비스로 약을 받아 조제해 주는 등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이 약국은 웬만큼 약을 구비한 곳. 그런데도 병원측이 원외처방전을 전면 발행하자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일반 약국의 사정은 불문가지. 의약분업 전면 시행을 20일 앞두고 ‘약 천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약이 없어 아우성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약이 없나〓약사들은 “무슨 약을 얼마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조제 품목은 2만6000종이나 되지만 약국이 이를 모두 갖출 수는 없는 노릇. 의사들이 자주 쓰는 처방 목록을 공개하면 그것을 위주로 약품을 구입하면 되는데 의사들은 처방전 자체를 지적 재산권으로 보는 데다 분업에 부정적이기 때문에 처방전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병의원의 의료보험 청구 실적을 근거로 특정 지역의 다빈도 처방 리스트를 작성, 약국에 돌렸으나 품목수가 1000∼3000종에 달해 약사들의 고민은 마찬가지. 서울 마포구 H약국의 약사는 “리스트를 살펴보니 병의원에서 이윤을 목적으로 사용해 왔지만 분업이 되면 처방할 이유가 없는 약품이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아스피린, 또는 라니지딘 성분의 위궤양약 같은 경우 품목은 하나이지만 브랜드는 40∼50개나 된다. 강북삼성병원 앞의 한 약사는 “같은 약을 다 구입해 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여기에다 일부 다국적기업들은 거래조건이 유리한 곳에만 약품을 공급하는 데다 일부 약국의 사재기가 가세해 특정 약의 품귀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제약회사의 사정〓약국은 소포장 완제품 형태로 약을 구입하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라벨 포장지 설명서 등을 넣어 소포장할 경우 저가 약품인 경우에는 제약회사 입장에서 수지가 맞지 않는다. 또 생산라인을 바꾸는데도 많은 돈이 든다.

제약회사들은 낭패를 보지 않기 위해 확실한 곳 아니면 약 공급을 꺼리는 경우도 많다. M제약 관계자는 “약을 줬다가 반품되거나 분업이 연기되면 어떡하느냐”며 “도매상 및 약국에 현금이나 담보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책은 없나〓복지부는 25일까지 전국 1만8600여개 약국 중 의약분업 대상이 되는 1만3000여개 약국이 웬만큼 약을 구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 병원 앞 약국은 1000품목 이상, 일반 약국은 500품목 이상을 갖추라고 권고한 상태이다. 또 저가 약품의 경우 약사회의 지역분회 등을 통해 공동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가지 상황이 꼬여 있고 약품 공동 구매도 경쟁관계인 약국끼리 협조가 잘 이뤄질지도 의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약품 오남용을 부추기는 항생제 스테로이드제 향정신성의약품 등 당장 의약분업을 시행해야 할 품목을 정부가 고시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시중에 약은 충분히 깔려 있고 제약회사들도 상당한 재고량을 갖고 있는데도 약이 제때 공급되지 않는다는 점. 제약협회 노준식(盧準植)기획실장은 “의사들이 처방 목록을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한편 약국들도 지금까지 제약회사의 약을 싼값에 앉아서 받던 관행에서 벗어나 합병 등 경영합리화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처음에는 왜곡된 의약품 관리체계가 개선되지 않아 혼란이 있겠지만 의약계의 이해 당사자들이 새로운 의료환경을 자각하게 되면 점차 의약분업이 정착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용관기자>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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