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앞 뒤가 맞지 않는 싱글마더 이야기 '이프'

  • 입력 2000년 6월 22일 11시 05분


하영(이혜영)은 아이는 원하나 결혼은 사양하는 비뇨기과 여의사다. 남성을 혐오하는 하영은 인공수정으로 임신 중이고 출산의 꿈에 부풀어 있다.

하영은 잡지 칼럼 기고로 알게 된 바람둥이 기자 선우(유태웅)와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선우는 자신만만한 하영에게 매력을 느낀다. 선우는 출산하는 하영에게 수혈해 하영의 생명을 구하고 사랑을 시작한다.

미혼 여성이 남자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설정은 <이프>가 노린 '발칙한 상상'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하지만 <이프>는 싱글마더라는 급진적인 재료를 반동적으로 요리한다.

이 영화가 누구를 싱글마더로 제시하는가를 보면 주제의 취약성이 금방 드러난다. 하영은 '필요 없는 걸 자르고' 싶어 비뇨기과 의사가 됐다고 말한다. 하영이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결혼을 거부하는 이유는 섹스말고는 없다. 그녀는 여성이 성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는 게 못마땅할 뿐이다.

하영은 남성으로부터 독립적인 여성과 남성을 피하는 여성을 혼돈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 짝뿐인 신발은 아무도 신발로 보지 않는다"는 말에 그렇게 쉽게 흔들릴 리 없다.

선우가 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더 가관이다. 선우는 섹스만 좋아하지 여자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인물이다. 그런 선우가 하영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하영이 자기의 섹스 파트너들보다 깨끗하기 때문이다. 하영이 섹스를 거부하는 이유가 뭐든 간에 선우에게 하영은 순결한 처녀다.

게다가 선우는 하영의 임신이 정자은행에 기증한 자신의 '씨'일 수도 있다는 것에 고무되어 기꺼이 피를 뽑아 하영의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이 수혈은 희생이 아니다. 선우는 몸 대신 피를 하영에게 집어 넣는 것이다. 이제 급진적인 싱글마더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구태의연한 순결주의와 수상한 가족주의가 영화를 끌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선우는 출산한 하영을 데리고 눈 덮인 산장을 찾는다. 선우는 하영에게 프로포즈를 하기위해 방 안 가득 장미꽃 대신 수 백 켤레의 아기 신발을 준비했다. 하영의 표정엔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은 감격이 가득하다. '이성애 핵가족' 틀에 모성애라는 그림을 끼워 넣은 <이프>는 '만약'에서 '역시나'로 착지한다.

<한승희(lisahan@film2.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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