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미국인 의식조사]디지털시대, 소설 운명은?

  • 입력 2000년 5월 30일 22시 38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런 저런 장치들을 개발해내고 있는 전자혁명은 흔히 활자의 발명과 비유된다. 그러나 디지털은 글자의 반대명제이다.

인쇄술은 개인이 혼자서 글 속에 빠져드는 것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해주었다. 인간의 의식을 집단적인 것에서 자기성찰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던 것. 그러나 전자장치들은 집단적인 것, 즉 소위 ‘지구촌’이라는 것을 더욱 강화시킨다. 마이크로칩을 통한 대화에는 인쇄물의 유령 같은 그림자가 포함돼 있으나 대화는 분명히 글이 아니다. 영화가 분명히 플롯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은 대중을 겨냥한 수많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적인 글은 거의 없다.

문학적인 소설은 과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될 위험에 처해 있는가. 나는 소설이 언젠가 낡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탁월한 문학 장르들, 서사시, 모험담, 자전적인 워즈워스 식의 운문들이 지금 어떻게 돼 있는가. 문학적인 웅장함은 이제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 됐다. 만약 허먼 멜빌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모비딕’ 같은 거대한 광시곡을 붙들고 씨름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형식과 장르는 살아있는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수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내면생활을 담을 수 있는 최후의 믿을만한 그릇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통신기술이 이룩한 쾌거 중의 하나인, 전문 지식을 컴퓨터에서 내려받는 것은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나무로 만든 의족과 같다. 세상에서 자신의 두 다리로 자리를 확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안에는 피와 살이 없는 것이다.

소설은 실용적인 목적도 교육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소설은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얽힘, 감각에 불을 밝혀주는 사건들, 난해한 은유 등이 바로 소설이 알고 있는 것들이다. 소설은 방 안의 가구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인간의 내면생활은 줄거리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영화로도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다. 하물며 모뎀으로 연결된 세상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골수 속에 들어있는 비밀스러운 목소리들은 정보의 배포를 용이하게 해주는 첨단기술 장치들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울림, 여러 가지 목소리들, 연약함과 희망과 초연함과 공포가 담겨있는 그 내면의 울림을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의 시대에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소설이라는 예술, 소설의 무한한 유연성과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은유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home/20000507mag-novel.html)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