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병훈/ '피로회복' 첫 발은 자기반성

  • 입력 2000년 5월 25일 20시 36분


큰일났다. 김대중대통령이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주변 인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집권세력 오만-독선이 원인▼

김대통령은 국민이 개혁정책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내각의 심기일전을 당부했다. 그러자마자 집권당 정책위의장이라는 사람이 경제장관을 불러놓고 마음껏 호통을 쳤다고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고 있다. 무엇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언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개혁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짜증내는 것이지, 개혁의 비용을 부담하기가 힘겨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각에 야단치고 분발을 독려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대통령 자신부터 심기일전해야 한다. 집권당 스스로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풀릴 것이다.

개혁은 원래 어려운 것이다. 오죽하면 혁명이 차라리 더 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러나 개혁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또다시 온 세상이 무너질 듯하던 국가붕괴의 위기를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니 김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냉정한 자기성찰을 촉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국민의 정부'가 왜 스스로 개혁의 피로에 대해 걱정하게 됐는가. 무엇보다 집권세력의 오만과 독선이 그 원인이 됐을 것이다. 대통령은 잘하고 있는데 내각이 문제다, 펀더멘털은 괜찮은데 홍보가 잘 안돼 정부와 국민 사이에 인식괴리가 생긴다 등등, 이런 발상을 고집하는 동안 국민의 마음은 멀어지고 말았다.

김대통령이 소수정권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며 '술수의 정치'에 집착한 것도 국민이 등을 돌리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의석수를 늘린다며 온갖 정상배까지 다 끌어 모았으니 개혁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없다. 개혁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니까 정도를 걸어야 한다. '국민의 정부'는 이 점을 묵살하려 했다. 개혁 냉소주의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크고 중요한 것' 하나만 알면 정치를 바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소수정권의 비애가 크고 반개혁 세력의 저항이 간단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럴수록 김대통령은 이 '크고 중요한 것' 하나를 잡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도 얻을 수 있다. 5000만 국민이 든든한 원군이 돼 주는데, 국회 의석 몇 개가 문제이겠는가.

이제까지 김대중정부는 국민을 도외시한 채 나 홀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니 개혁이 될 리가 없다. 국민이 적극적, 주체적으로 동참할 때 비로소 개혁이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국민이 그런 신바람을 낼 수 있을까. 정치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의 정치가 펼쳐지면 개혁의 반은 달성된 셈이나 마찬가지다. 진실로 정부가 개혁을 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 이것이 감동 정치의 출발점이다.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해야▼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부터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솔선수범을 보여줘야 한다. 지난 총선에서 잘 나타났듯이, 이 점에서 김정권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개혁의 정신을 퇴색시키는 일을 거듭했다. 지금부터라도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펴면서 자기희생의 결단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개혁의 명분이 생기고 추진력도 얻게 된다.

섣부른 영웅주의는 개혁과 상극이다. 임기 동안 무엇을 가시적으로 끝내겠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히면 개혁은 공염불이 될 뿐이다. 그저 다음 정권이 물려받아 결실을 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그래야 개혁을 할 수 있다. 국민을 얕잡아 보면 안된다. 날림공사인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튼튼한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 못할 국민이 아니다.

눈앞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우직하게 기초를 다져나가는 개혁이라면 국민이 박수를 아낄 이유가 없다. 제대로 한번 피로를 느껴 보았으면 하는 것, 이것이 진짜 민심이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