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핫라인]영화 '킬리만자로' 안성기

  • 입력 2000년 5월 21일 19시 44분


영화 ‘킬리만자로’가 개봉되던 20일, 서울극장옆 카페에서 만난 안성기에게는 아직도 영화속 깡패 ‘번개’의 흔적이 보인다. 그을린 얼굴, 약간 남아있는 촌스러운 퍼머 머리 기운. ‘불량’해 보인다고 말을 건넸더니, “양아치 말투도 좀 남은 것같아. ‘야,짜샤∼ 밥먹었냐’ 이런 거 있잖아”하면서 웃는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킬리만자로’만큼 어떤 위안도, 미화도 없이 밑바닥 인생의 삶을 잔인하도록 처절하게 그린 한국영화가 또 있을까. 안성기도 “요즘 영화중 제일 무거워요. 그게 장점도 되고 상업적으로는 단점도 되겠지…”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이야기 전개에 많은 약점이 있지만, ‘킬리만자로’가 관객들에게 삶의 스산함을 전달하는데 성공한다면 아마 안성기가 맡은 ‘번개’ 때문일 것이다.

‘번개’는 한때 잘 나가던 깡패 두목이었으나 이제는 기도원 철거 시위에나 동원되는 퇴물 건달. 위엄있는 척 폼을 잡아도 몰락한 자의 초라함이 묻어나오고, 건들거리는 행동거지로도 내면의 선량함을 감출 수 없다. 안성기는 이전의 단정한 모습과 180도 달라진 능청스러운 연기로 시나리오에선 건조한 성격이었다던 ‘번개’를 가슴 시린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로 생생하게 살려놓았다.

“촬영할 때를 생각하면 아, 한 겨울 잘 보냈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주문진에서 배우들과 계속 같이 먹고 자고, 그 의상 그대로 입고 그 인물들처럼 살았으니까. 다른 영화에서보다 인물에 더 접근할 수 있었던 경험이 됐죠.”

영화 속에서 그가 쓰고 나온 우스꽝스러운 파란 모자는 “지난 겨울 스키장에서 산 애기 모자인데 턱 끈을 자르고 머리에 걸친 것”이란다. 구두도 10년 넘게 신던 걸 들고와 거친 바닥에 옆을 갈고 밑창을 칼로 그어 더 헌 신발로 만들었다. 그런데 ‘대배우’가 그런 것까지 직접 해야 하나?

“그런 게 참 재미있어요. 그런 걸 준비하면서 정말 ‘번개’가 되는 기분이 들지.”

그에겐 요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킬러에서 ‘킬리만자로’의 깡패를 거쳐 7월에 중국에서 촬영을 시작할 ‘무사’의 전사까지 액션영화가 줄을 잇는다.

“사실 멜로보다 남성적인 톤의 영화가 더 좋아요. ‘킬리만자로’의 ‘번개’도 대개의 남자들이 갖고 있을, 거칠고 흐트러진 인생에 대한 동경을 대변하는 인물이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싶진 않겠지만…. 연기자로서 그런 인물이 마음에 들어요. 내게 잠재된 요소를 쓱 꺼내 욕도 슬쩍 해보고, 진한 감정도 느껴보고….”

인터뷰가 끝난뒤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그는 영화사 직원에게 “2,3회 관객 반응을 꼭 확인해야 된다”고 당부하고, 한 후배 감독 이야기를 꺼내며 “걔한테 색깔이 잘 맞는 영화를 해야 할텐데” 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듣던대로 정말 ‘맏형’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그가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굳은 얼굴로 받고 나더니 머쓱해하며 웃는다. “난 말야, 핸드폰 진동이 올 때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깜짝 깜짝 놀라. 이게 영 익숙치가 않네.”

아무리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 같은 폼으로 최첨단 디지털 핸드폰 CF를 찍어도 그에게 여전히 온기가 느껴지는 건, 다정하고 따사로우면서도 원칙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 그런 아날로그형 인간미 때문일 것이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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