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러브 바이러스/너의사랑은 폭력

  • 입력 2000년 5월 15일 19시 48분


“I LOVE YOU/I LOVE YOU/I LOVE YOU/…”

“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구석도 빼놓지 않고 사랑합니다. 당신이 ‘나’만의 사랑이기를 원하는지라 당신의 전부를 저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저의 사랑은 디지털 코드로 자체 복사되는 까닭에 수천 수억만 번 복사되더라도, 천년 만년이 지나더라도 변치 않습니다. 저를 흉내내는 수많은 변종들이 생기겠지만 그들은 아류일뿐 진정한 저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제게 두려운 것은 단 한 가지, 당신의 무관심입니다. 제 사랑의 고백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서러움에 홀로 흐느끼다 스러져 버릴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의 뜬금없는 러브레터를 클릭해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몸과 마음에 저의 사랑을 끊임없이 복사하여 당신을 저의 ‘망부석’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랑은 도대체가 막무가내다. ‘사랑’을 명분으로 상대의 삶 전체를 장악해 버리려 한다는 점에서는 스토커와 유사한 형식을 취하지만 처음 이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미 상대가 누군지조차 모른다.

‘사랑’을 미끼로 한 폭력일 뿐 스토커가 가지는 이기적 사랑의 선의조차 없다. 그가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의 폭탄을 날려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간 개인의 능력이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4500만대의 컴퓨터를 마비시켜 170억 달러에 이른다는 물질적 피해는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입었을 정신적 피해와 복구불가능한 시간의 손실을 생각한다면 그는 문명의 이기를 흉기로 이용하는 흉악범이 분명하다.

처벌을 통해서 범죄자를 다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회복시킨다는 헤겔의 응보주의적 처벌관을 따른다면 그를 얼마나 “I LOVE YOU”해 줘야 그가 정의 갱생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다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러브바이러스 파일이 복사된 횟수만큼, 아니 어쩌면 복사된 파일 개수만큼 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컴퓨터바이러스로 시스템을 보호하거나 불법복제를 막는다는 이유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로 인한 불특정 다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 혹은 국가보다 강한 독점기업의 특정 프로그램만 공격해 그 독점기업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독점기업의 권력에 대한 저항권 행사를 정당화할 만한 도덕적 파국상태는 온 적이 없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헤르만 뤼베가 지적하듯 권력에 대한 저항권으로라도 인정되려면 폭력에는 도덕적 이상의 회복을 위한 과도적 수단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흉악범인지를 모른 다는 데 있다. 기술경쟁력의 확보에 혈안이 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지게 된 엄청난 능력에 상응하는 책임을 망각하고 있다. 한국 정보산업의 새로운 산실로 부상하고 있는 PC방에서 청소년들이 프로게이머와 벤처기업가의 신화를 숭배하며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는 동안 그 기술의 주체인 인간과 그 기술 자체가 갖는 사회적 책임의 교육은 길거리와 교정을 방황하고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한 이기적 사랑은 스토커가 되고, 자본의 공적 가치를 배우지 못한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가 된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배우지 못한 과학기술은 폭력이 된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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