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서정인/난봉산 품에 안기니

  • 입력 2000년 5월 7일 20시 29분


오늘 아침 창 밖으로 다가온 난봉산에 안개가 가득하다. 나는 올 봄 들어 이 산을 8번인가 올랐다. 그 전에는 그 산에 오른 적이 없었다. 높이 570m인 그 산의 골짜기에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있다. 그 샘에 가서 물을 길러 오는 데에 한 시간 반이 조금 못 걸린다. 나는 그 샘을 산에 네번째인가 갔을 때 발견했다.

처음 올랐을 때 딴 곳에서 가뭄에 말라 물이 찔찔 떨어지는 샘을 만났다. 10분을 받아서 한 잔을 마셨다.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1주일 뒤 그 물을 다시 찾아갔다. 샘은 아무 데에도 없었다. 분명히 그것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갔는데 그것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 일주일 뒤 그 곳을 다시 찾았다. 샘은 신비스럽게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길이 없는 숲 속을 한 시간 가량 헤맸지만 허사였다. 나는 산에 홀린 것 같았다.

네번째 갔을 때 나는 그동안의 그 근처의 지리에 대한 기억과 감각을 곰곰이 되살리고 정리해서 좀 엉뚱하다 싶은 곳으로 짐작보다 더 멀리 갔다. 샘이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샘이 있었다. 그것 자체의 모습은 물론 주위의 지형지물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말없이 나를 맞았다. 그것의 침묵과 불변은 그것의 나타남을 그것의 사라짐 못지 않게 신비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그것도 그것 덕이었다. 샘은 그동안의 가뭄의 계속을 견디지 못하고 실낱같은 줄기가 방울방울로 바뀌어 있었다. 한참을 옹색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물 한 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 물 한 병을 받자면 1시간이 좋이 걸릴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물병이 6개였다.

그 때 문득 이 놀라운 숲을 안고 있는 산이 여기 말고 딴 데 또 샘이 없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숲은 매화와 산수유와 진달래가 뼈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의 갈색을 바탕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왜 저 꽃들은 잎보다 먼저 필까? 꽃망울들은 엄동설한을 견뎠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다 그럴 만해서 저렇게 눈처럼 하얗고, 저렇게 햇볕처럼 노랗고, 저렇게 핏빛으로 붉었다. 나뭇잎들은 골이 찬란하게 물든 것을 보고, 싹을 내보낼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꽃들은 선구자였다.

계곡을 조금 내려가자 시내가 시작되었다. 냇물은 바위틈으로 흘러나왔다가 힘을 잃고 자갈밭 속으로 잦아들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물이 불었다. 나는 고인 물에서 조심스럽게 3병을 채웠다. 거기서 더 내려가자 옹달샘이 있었다. 나는 물병들을 새로 채웠다. ‘여기는 옥천동과 향동의 식수원입니다.’ 관리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오래 전에 발견된 샘이었다.

난봉산의 정상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있었다. 몇 주 뒤에 틀림없이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다시 갔을 때 초소가 간 곳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초소도 빈집이 아니라 감시원이 상주하는 듯 간단한 개인 소지품들이 벽에 걸리기도, 의자에 놓이기도 했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딴에는 산 감각이 풍부하다고 자부했었는데 길눈이 어두웠다. 정상은 거기에서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 쪽에 있었다. 아마 산의 아름다움과 경이에 혹해서 나의 이성이 합리적인 사고의 기능을 일부러 잠시 정지시킨 모양이었다.

난봉산 이야기를 했더니 여자는 팔난봉의 난봉이냐고 물었고 아해는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인가보다고 했다. 난봉산(鸞鳳山)은 전설적인 영묘한 새가 깃든 산, 또는 그 새가 내려앉은 것처럼 생긴 산이다. 그것은 연작(燕雀) 옆에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큰 덕을 베푼다.

나는 그 산자락에서 500m도 안 되는 곳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근 20년을 거기서 살았다. 그것은 딴 산들과 함께 내 어렸을 적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 곁을 떠난지 45년 만에 처음으로 그것의 품에 안겼다. 시내의 집들과 길들은 거의 옛 모습을 간직한 것이 없다. 들판도 변했다. 오직 산만이 변함이 없다. 그것은 그것이 세세연년 철따라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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