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산불 이재민르포]"살 집보다 코앞 농사일 더 걱정"

  • 입력 2000년 4월 19일 21시 25분


19일 오후 강원 강릉시 사천면 석교1리 사천중학교 운동장 산불이재민 수용소. 7일 발생한 산불로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말이 없었다.

석교1리의 110가구 중 25가구가 이번 산불로 집을 잃었다. 이들은 5.5평짜리 컨테이너 박스 29개를 임시거처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 수용되지 않은 다른 주민들도 집이 불타진 않았으나 가축을 잃고 농기계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당장 들어가 살 집도 문제지만 코앞에 닥친 농사일이 무엇보다 걱정입니다.”

평생 고향을 지키며 농사만 지었다는 강재식(姜在植·76)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씨의 가족은 함께 농사를 짓는 아들 내외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손자 등 5명. 산불이 난 7일 오전 9시10분경 강씨는 혼자 집에 있다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덮쳐온 불길을 피해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이앙기 트랙터 농약분무기 바인더…. 농기계와 사료 비료까지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어요. 땅은 있지만 무엇으로 올 농사를 지을지….”

강씨는 28년 전 남의 땅에 집을 짓고 살아왔으나 이번에 집이 타버리자 땅 주인이 개축을 허락하지 않아 당장 집을 지을 수도 없다. 마을 입구에 1800여평의 논이 있지만 농업진흥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지을 수도 없는 처지.

아끼던 컴퓨터를 불길에 잃어버린 두 손자를 생각할 때마다 강씨는 더욱 마음이 아프다. 거금 144만원을 주고 어렵게 사 준 컴퓨터였다.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최돈민(崔燉珉·65)씨도 사정은 마찬가지.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적십자사와 사천면 부인회 등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 버텼으나 20일부터는 각자 음식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그릇부터 사야 한다. 옷도 불을 피할 때 입고 나온 게 고작. 물이 부족해 세탁도 맘대로 할 수 없다.

“석교1리는 6·25전쟁 때도 6가구밖에 불타지 않았는데 이번 산불로 25가구가 집을 잃었어요. 이재민들은 전쟁 때보다 지금이 더 참혹한 것 같아요.”

20년간 농사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는 김창기(金昌起·41)씨도 세간은 말할 것도 없고 경운기와 콤바인 등 농기계를 모두 잃어버려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다.

“복잡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우선 농기계만이라도 얻어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농사를 지어야 아픔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김씨를 바라보는 부인과 어린 두 자녀도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강릉〓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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