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홍준의/가계부쓰는 남자로 살기

  • 입력 2000년 3월 28일 19시 41분


◇홍준의씨(32·오리콤 매체전략팀 차장)◇

“지금 지갑에 6만3000원 있거든요.”

광고회사인 오리콤 매체전략팀의 홍준의차장(32·서울 양천구 신월동)은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 늘 근사치로 맞춘다. 지갑에 지폐를 넣어두는 순서도 바깥쪽부터 1만원권, 5000원권, 1000원권 등으로 정해놨다. 10만원권 수표는 늘 지폐와 분리해서 다음 칸에 넣는다.

그러나 아내 송미진씨(29·출판기획)는 영 딴판이다. 지갑 속엔 언제나 카드영수증, 크고 작은 지폐가 뒤죽박죽이다. 지폐를 펴지 않고 넣어두는 건 물론 얼마가 남았는지 모르고 한 푼도 없이 출근했다 낭패를 겪는 일도 적지 않다.

홍씨는 3년 전 결혼할 때 아내에게 “아껴서 뭘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한 달 동안 어떤 항목에 얼마나 쓰는지 가계경제의 흐름을 알아보자”며 가계부 쓰기를 제안했다. 아내는 “매일매일 쓴 걸 적고 체크하면 부담되잖아. 우리가 헤프게 쓰는 것도 아닌데 그냥 편하게 사는게 어떨까?”하는 것이었다.

결국 대학학보사 선후배사이인 홍씨부부는 서로의 이런 ‘개성’을 인정, 남편인 홍씨가 가계부를 적는 데 합의했다.

▼터프한 아내, 섬세한 남편▼

아내의 월급은 전액 홍씨의 통장에 입금됐고 홍씨는 가계부를 1주 단위로 3년 넘게 관리해오고 있다.

가계부적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1∼2주에 한 번 하는 장보기 쇼핑은 신용카드를 주로 사용하는 데다 전기료 가스료 기부금 등은 은행에 자동이체를 해놓아서 매일 가계부를 적을 필요가 없기 때문.

대신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K신용카드 홈페이지에 접속, 신용카드 사용내용을 일괄조회한 뒤 가계부에 항목별로 기입하며 한 주일을 정리한다. 이를 위해 엑셀프로그램으로 자신만의 가계부도 만들었다.

1년 전까진 신용카드도 ‘가구당 1개’로 밀어붙였다. 대신 서로의 일정을 미리미리 달력에 표시하도록 약속한 뒤 아내에게 한턱내야 하는 일정이 있는 날엔 홍씨가 갖고 다니던 신용카드를 건네줬다. 백화점카드를 이용하는 방법도 정해놨다. 아내에게 “10만원 이하 제품을 살 땐 일시불로, 20만원이 넘는 물건을 살 땐 무이자인 3개월 할부로 사라”고 일러뒀다. 10만원 이하의 물품을 할부로 사면 무이자로 인한 혜택보다는 몇 달간 구매한 걸 기억하며 절약해야 하는 게 더 번거롭기 때문.

이런 홍씨에게 아내는 “왜 사소한 것에 목숨거나 몰라?”했다.

▼누가 아낸지, 남편인지▼

주 중 한 두번 아내의 지갑을 열어보고 용돈이 떨어졌으면 보충해주는 것도 홍씨의 일.

아내에게 주급으로 용돈을 주지만 ‘쓰임새의 규모’를 모르는 아내는 주 중에도 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지갑에 돈을 다시 넣어줬더니 다음날 아내는 말했다.

“형, 이번 주엔 내가 돈을 별로 안 썼나봐. 오늘 보니까 아직도 많이 남았대….”

게다가 아내는 점점 더 ‘개념없는 남편’처럼 변해갔다. 원래 ‘생긴 것과 달리 성격은 여자처럼 꼼꼼하다’는 평을 듣던 홍씨가 가계부까지 적다보니 살림이 걱정돼 한푼이라도 덜 쓰는 반면 아내는 씀씀이가 점점 커지는 것.

급기야 아내의 한달 동안의 술값 지출 카드비가 홍씨보다 많은 경우도 생겼다. 대신 살림을 맡은 홍씨는 반대로 돈을 쓸 때면 ‘손이 떨렸다’. 또 신용카드나 백화점카드를 사용한 뒤엔 영수증을 한 달간 모아뒀다 카드 명세서가 날아오면 꼼꼼히 항목을 확인하는 홍씨완 달리 아내는 좀처럼 챙겨오는 일조차 없다.

“돈을 받아쓰는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죠. 그렇지만 주는 사람의 입장은 영 다르더라구요.”

왜 ‘보통 아내’들이 돈 가지고 바가지를 긁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점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고충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수입과 지출이 투명한 데다 가끔가다 친구들에게도 인심을 쓸 수 있는 게 가계부쓰는 장점이라고 말한다. 이걸 안쓴다면 가뜩이나 꼼꼼하고 정리정돈에 투철한 성격의 홍씨는 뭔가 뒤죽박죽인 듯한, 머리 속에 실타래가 엉킨 듯한 찝찝함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 성격대로, 하고싶은 대로 산다는게 가장 큰 잇점이랄까.

그런데 문제는 아내가 저축이 얼마인지, 한 달에 얼마나 쓰는지 등 가계살림에 점점 더 관심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이러저러한 지출을 했다고 말해도 “형이 알아서 잘 했겠지”라며 가계부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도 없다.

올초, 새 밀레니엄을 맞아 일년씩 교대로 가계부를 쓰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어째 자신만 자꾸 손해보는 느낌이었기 때문. 그러나 아내는 절대 싫다고 한 번에 거절했다.

“멋있는 여자랑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그래서 내가 팔불출소리를 듣나봐요.”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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