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래정/官治냐 건전성감독이냐

  • 입력 2000년 3월 1일 19시 31분


80년대 후반 국내 증권사들은 신규지점 인가를 받기 위해 증권전산주문단말기와 전화회선을 충분히 확보했다는 증빙서류를 정부에 제출해야 했다. 공급이 달렸기 때문이다.

당시 각 지점의 여분 전화기를 모아 한 지점이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은 뒤 지점인가 승인서에 첨부했던 증권사 직원은 “그때 이후로 금융당국의 정책 하나하나를 ‘관치’라는 시각에서 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증권사가 PC방 운영업자와 제휴하는 사례가 늘어 고객정보 유출과 불법 투자상담의 소지가 생겼다며 새 지침을 마련했다. 해킹방지 프로그램을 깔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막을 칸막이를 설치하라는 것이 골자.

증권사 직원들 사이에선 즉각 “PC를 통한 주식거래 비중이 나날이 커가는 상황에 또 하나의 규제가 생겼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장 내 금융전문가들은 새 금융관련 규정이 나올 때마다 “감독이 판치는 한 시장의 자기정화 기능은 살아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반면 금융당국은 “시장이 무너지는데 팔짱을 끼고 있으란 말인가”라고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잡음을 일으킨 국민은행 후임행장 추천절차는 IMF체제 이후 확립된 전례를 따른 것이다. 조흥 한빛 주택은행 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장을 골랐기 때문에 금감위가 ‘감독당국의 책무를 다하는 차원에서’ 전례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금감원 고위인사가 후임에 내정됐다더라’는 설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관치부활’쪽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이 바람에 후임행장이 갖춰야 할 덕목이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보다 선임절차가 관심을 끄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관치와 건전성감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하기는 매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금융기관 경영이 투명하고 시장의 신뢰를 받을수록 당국의 개입여지는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박래정 경제부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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