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24)

  • 입력 2000년 1월 14일 18시 50분


구십 년 여름 방학 때에 이희수 씨는 서울에 다니러 갔고 나는 그냥 베를린에 남아 있었어요. 잠깐 다녀오고 싶기도 했지만 서울에 가 봐야 집에서 늙은 어머니가 챙겨 주는 음식치레로 살이나 디룩디룩 찔 게 뻔했고 은결이를 보러 정희네 집에 들르는 일도 번거로웠거든요. 내가 돌아가서 대학 선생 노릇이라도 하려면 뭔가 간판을 만들어 가야 할텐데 여기선 예술대에는 학위 따위가 없어요. 디플롬이 석사인 셈인데 쟁이들은 마이스터 쉴러를 해야 하거든요. 지도교수는 자유 구상 경향인 내 그림을 매우 좋게 생각하고 있어서 다행인 점도 있었지요. 어쨌거나 다 마칠 때까지 되도록 서울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팔 월 말이었는데, 그 때가 저녁 무렵이었어요. 베를린의 여름은 밤 열 시가 넘도록 주위가 부옇게 밝아요. 오후 세 시만 넘으면 어두워지는 겨울과는 정반대지요. 그래서 황혼 무렵부터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몇 시간 동안이나 저녁 무렵의 고즈넉한 박명에 잠겨 있는 기분이 괜찮아요.

도어 옆의 인터폰이 울렸어요.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건 송영태였지요. 나는 버튼을 눌러 정문을 열어 주었어요. 잠시 후에 도어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고 송영태가 등장했어요. 양 손에 트렁크와 짐을 잔뜩 들고 우스꽝스럽게도 도시에 처음 나온 시골뜨기처럼 곤색 양복에 하얀 셔츠에 붉은 넥타이까지 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있는 거예요.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깔깔 웃어버렸지요.

뭐야, 장가라두 가는 거야?

물 한 잔 주라.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 쥐고 있던 짐을 놓더니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다 주니까 벌컥이며 단숨에 마시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대체 어디서 오는 거야?

보면 모르니? 먼데서 오는 길이다.

먼데라니….

유라시아 대륙을 넘어 왔다구.

피이, 비행기 안타본 사람 있나?

우랄산맥과 씽안링산맥을 넘긴 힘들 걸.

하더니 영태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목단추를 끌렀습니다. 그는 트렁크 옆에 놓인 쇼핑백과 상자를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 놓았어요.

이게 다 뭐야?

그는 말없이 백과 상자를 뜯고는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 놓았어요. 인삼주며 백두산 들쭉술이며 영광 담배와 장뇌삼 등속이었어요. 그제서야 그가 어디서 오는가를 눈치채게 되었죠.

무슨 뜻이니… 이건?

나 평양서 오는 길이야.

거긴 니가 왜 가?

다들 못갈 데라구 해서 갔다 온다 왜….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에 벌어진 일들로 해서 나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거든요. 다만 이건 좀 비약이 아닌가 의아하기도 했어요.

너 정말 언제까지 방랑의 무법자 노릇만 할래?

영태는 그 무렵에 남과 북과 해외동포들이 떠들썩하게 벌인 무슨 행사인가에 다녀온게 분명했어요. 그는 아마도 독일에 사는 교포를 따라서 참가했겠지요.

나는 지갑을 챙겨들고 일어났어요.

나가서 저녁 먹자.

여기서 밥 안해줄거야?

우리 음식 실컷 먹구 왔을텐데 뭘 그래. 나 피곤해. 아무거나 주는대루 먹어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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