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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9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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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능한 감독의 ‘세기말’은 영화속 대사처럼 ‘늘 희망 없고 미래 없는 현실’로 직진해 들어가는 도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모라토리엄’ ‘무(無)도덕’ ‘모랄 헤저드’ ‘Y2K’ 등 네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됐다. 기승전결식 구성보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을 통해 세기말 한국의 현실을 펼쳐 보이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모라토리엄’의 주인공인 시나리오 작가 두섭(김갑수 분). ‘닭살 돋는’ 멜로영화 시나리오를 쓰려고 애를 쓰지만 그의 눈에는 ‘한끗 차이’로 살고 죽는 현실의 비정함이 보일 뿐이다. 결국 멜로작품을 포기한 그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잇따라 터지는 한국 땅에선 “영화가 절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탄식한다.
‘무도덕’과 ‘모랄 헤저드’에서는 ‘영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만신창이가 된 인물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여대생 소령(이재은), 교수자리를 따내려 발버둥치는 속물적 대학강사 상우(차승원). 이들과 정반대의 극점에는 천박한 졸부 천사장(이호재)이 있다. 천사장과 소령의 노골적인 정사 장면은 천민자본가의 추악한 몰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각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요요 사내(안석환)가 저지르는 살인사건을 매개로 서로 연관을 맺는다. 귀퉁이가 얼룩진 한 장의 수표가 돌고 도는 과정을 통해 소령의 출구 없는 현실을 묘사한 방식도 재치 있다.
송능한 감독은 풍자가 넘치는 전작 ‘넘버3’와 달리 이 영화에선 정공법을 택했다. 그러나 그의 촌철살인식 대사의 묘미는 여전하다. 시나리오 작가 두섭은 영화평론가에 대해서도 독설을 퍼붓는다. 한편으로는 두섭과 천사장, 대학강사 상우가 쏟아내는 말들이 너무 많은데다 교훈적인 느낌이 강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
비약적인 느낌을 주는 점프 컷, 위에서 내려 찍은 부감 촬영, 비디오를 이용한 ‘셀프 카메라’ 등 파격적인 카메라 기법과 신해철의 음악은 암울하고 거친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스타에 눈독들이지 않고 연기파 배우들을 기용해 캐릭터 묘사에 집중한 것도 이 영화의 미덕.
‘세기말’은 영화 마지막에 ‘21세기초’로 건너뛴다. 세기가 바뀌어도 세상은 여전하다. 이 진창같은 삶에 과연 희망이란 있는 것인가. ‘세기말’은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하나씩 안겨주는 영화다. 18세이상 관람가. 11일 개봉.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