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살아보니]앤드루 포드/외국어엔 열심 외국인은 기피

  • 입력 1999년 12월 7일 19시 48분


한국은 내게 제2의 고향이다. 부모님은 생후 9개월된 나를 안고 한달간의 항해 끝에 한국에 왔다. 아버지는 부산 일신기독병원에서 선교사로 근무했다. 두 동생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5년 동안 대부분 부산 동래에서 살았다.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초가지붕과 논으로 둘러싸인 집 주위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네 아이들에게 ‘벽안(碧眼)의 소년’은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금방 친구가 됐다. 어느날 밤 우리 집 발코니에서 시장에 큰불이 난 것을 본 기억도 있다.

7월 어머니가 방한했을 때 부산에 함께 가보니 추억이 서린 옛집이 없어져 조금 아쉬웠다. 어머니는 용인 민속촌에서나 초가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당시 나에게 ‘호주’는 그저 단어일 뿐이었고 한국이 고향이었다. 나는 모심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때 친구들을 꼭 만나고 싶다. 다섯살쯤 됐을 때 나는 영어 한국어 모두 유창했다. 그 뒤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렸지만 한국만은 잊지 않았다. 호주에 이민온 한국인 신씨 가족과 가깝게 지내면서 어릴 적 경험했던 한국인의 인정과 음식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부모님은 “한국인과 친구가 되면 가장 충실한 친구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첫 해외 근무지로 한국에 오게 돼 나도 깜짝 놀랐다. 두 아들도 대를 이어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게 무엇보다 기쁘다. 오늘의 한국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30여년 전의 한국이 아니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국가 위상도 높아졌다.

한국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전국의 명산과 고궁 박물관 등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해변 산기슭에 울퉁불퉁하게 자리잡은 부산의 모습은 왠지 친근감이 가고 경주의 역사와 심오한 문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등산을 갈 때마다 한국인의 끈기에 놀란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체력이 훨씬 강한 한국인들을 뒤쫓아가느라 헉헉대기 일쑤다. 용산 한국전쟁기념관에서 일제 통치와 한국전쟁 등을 견뎌내고 오늘의 한국을 일군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국인의 심리, 구한말 개혁파와 수구파의 갈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한국이 가장 민족주의적인 나라가 됐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끈끈한 가족관계를 바탕으로 함께 움직이고 서로 돕는다. 이것이 큰 힘이 될 수 있지만 때론 약점일 수도 있다. 해외 선교활동을 하는 한국인들이 외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낯선 문화를 수용하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바깥 세계와 상호 협력하는 세계화의 자세가 더 필요하다. 영어학습 열기는 감탄할 정도이지만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막상 어울리는데는 소극적이다. 외국인들의 눈엔 불친절로 잘못 비쳐지기도 한다.

나는 외국인들이 가져온 ‘생소함’을 겁내지 말라고 한국 친구들에게 충고하고 싶다. 부모님은 한국의 낯선 환경을 받아들여 한국을 떠날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다. 나도 한국을 떠날 때는 좀더 다르게 변해 있길 기도한다. 대신 나도 한국인의 가슴 속에 호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남겨주고 떠나고 싶다.

앤드루 포드<주한 호주대사관 1등서기관>

▼약력▼△63년 호주 왕가라타 출생 △64∼69년 한국 거주 △84년 모나쉬대 경제학 석사 △85년 호주 외교통상부 근무 △99년 3월 호주대사관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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