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1)

  • 입력 1999년 11월 2일 19시 48분


중심가는 차츰 사람을 몰아내고 밤에는 아무도 없는 거대한 콘크리트 탑만을 남긴 채 텅 비어 버린다. 도시의 각 구역이 아직은 나누어진 하나의 공동체였던 백년 전과는 다르리라. 시골뜨기 푸르동이나 바쿠닌이 보았던 빈민가의 활기 따위는 없다. 현대 도시의 구역과 동네는 냉정하고 질서정연한 먹이사슬로 나누어져 있다.

고속버스가 낯익은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반에서 가방과 짐을 챙겨 들었지만 우리 일행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승객들이 거의 다 내리자 주임이 먼저 통로를 빠져 나갔다. 그 뒤에 내가 서고 교사 두 사람이 내 뒤에 붙어섰다. 나는 그들이 염려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계호자 없이는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느낌이었다. 몇 년 동안 혼자서는 한번도 이동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류장에서 터미널 건물의 구내를 통과하는 대합실에서 나는 잠깐 방향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왜 그래?

뒤에서 따라오던 양복 차림의 교사가 물었고 점퍼가 가볍게 내 등을 밀었다.

저기 주임님 뒤통수 보이지?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구.

두리번거리다가 주임의 치깎은 뒷머리를 발견하고 그를 쫓아간다. 양복이 말한다.

여기두 저 안하구 다를게 없다구 생각해요. 그럼 훨씬 편해질 걸.

나는 동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겠다며 마음 속으로 끄덕거린다. 그래, 나는 거대한 감옥 속에 되돌아온 것이다. 밖에 나오자마자 도심지의 한복판이었다. 주임이 기다리고 섰다가 모두 모이자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가만있자…벌써 점심 때잖아.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요. 예정대루 하면 되죠.

예정표가…응 여기 있어.

주임이 수첩을 펼쳐들고 들여다 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점심 먹고, 고궁 견학하고, 개봉영화 하나 보고, 백화점 참관하면 오늘 일과 끝이야. 무엇부터 할래?

나는 그가 말한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구치소에서 재판 받으려고 법원을 오갈적에도 호송버스에 탄 피의자들은 모두 철망이 쳐진 창가에 앉으려고 앞을 다투었다. 그래야만 낯익은 거리의 어느 한 모퉁이라도 훔쳐 볼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창에 이마를 처박고 바라본다한들 건성으로 고개만 그쪽에 돌리고 있을뿐 아무 것도 뇌리에 남는 것은 없다. 그곳은 이미 그가 떠나버린 곳이며 끼어들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글쎄요, 난 어디가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

남은 시간에 거길 다 가볼 수 있겠어요? 우선 밥부터 먹읍시다. 시간을 보아 가면서 일정 조정을 해야죠.

점퍼가 말하자 주임이 결정했다는 듯이 다시 앞장을 섰다.

자, 택시를 타야지.

우리는 다른 선량한 시민들처럼 줄에 서서 기다렸다가 택시에 오른다. 운전석 옆에 앉은 주임이 말했다.

단성사 앞이요.

하고나서 그는 뒤로 고개를 돌리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내가 영화 프로를 다 살펴 놨거든. 역시 홍콩 무협영화가 시간이 잘 가데. 밥은 표 사놓고 근처에서 먹지 뭐.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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