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34)

  • 입력 1999년 10월 1일 19시 13분


나는 다시 열에 떠있는채로 까무룩하고 졸았던 듯싶다. 현우씨의 꿈을 꾸었다. 그는 어둠 속의 내 방 안에 들어와 벽에 기대어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모으로 누운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고 어찌된 일인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은 어느 틈에 다시 갈뫼의 그 방으로 바뀌었다. 그가 기대고 앉은 벽 위로 창호지 바른 들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과 촛불도 보였다. 내 옆에는 작고 네모진 은결이의 자리가 깔려 있었고 이제 갓난 아가는 물처럼 가녀린 손을 이불 자락 밖으로 빼꼼히 내밀고 잠 들어 있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서 나즉하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무슨 노래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방 안은 그의 비좁은 옥방으로 바뀌었다. 아, 이런데서 사는구나. 내가 본 것은 저만치에 무슨 구멍처럼 뻥 뚫린 옥창뿐이었다. 웬일인지 은결이까지 이곳에 따라 들어와 있다. 그가 내 바로 옆에 누워서 두 다리를 구부리고 그 위에 은결이를 태우고는 연신 중얼거렸다. 말 탄 양반 끄떡, 소 탄 양반 끄떡. 할 적 마다 아이가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은결이를 내게 넘겨주더니 슬그머니 일어선다. 어디 가요, 잠깐 기다려요. 하며 일어나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 하지만 몸을 꼼짝할 수가 없다. 은결이가 기어서 제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문만 남아있고 그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은결이도 없어지고 앙앙대는 울음 소리만 귓바퀴에 가득 찬다. 나는 아이를 찾으려고 몸을 뒤척이며 두리번거린다. 눈을 떴다. 전화 벨 소리가 길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앉았다.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흥건한 턱 밑과 목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유리문을 밀고 화실 쪽으로 내려선다. 그제서야 몹시 목이 마르면서도 누워서 버티던 생각이 났다. 그래 전화도 받아야지. 나는 화실 탁자 위에서 요란하고 길게 울고 있는 구식 수동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아 나야, 웬일이야 전화를 여러번 걸었는데 받지두 않구.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하던 마음이 가시며 맥이 빠졌다. 송영태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새로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몇 신줄 알아?

몇 시야?

열 한 시가 넘었다구. 데리러 갈까 하다가 전화두 안되지, 그래서 혼자 일하구 있었어.

응 그랬구나. 난 좀 쉬어야겠어.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한 형 어디 아픈 거야?

그저 그래. 몸살인가봐.

어 큰탈났네. 약 사다 줄까?

별 거 아냐. 집에 들어갈 작정이야.

그게 좋겠다. 새벽에라두 들를까?

아니, 지금 일어서려던 참이야. 나중에 봐.

몸조리 잘해라. 또 연락할게.

송영태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 넘어로 사라졌다. 왜 그런지 들고 있던 수화기 속의 저 깊은데서 지잉 하는 전자음 소리가 공허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영태를 만날 수가 없게 된다.

정말 집에 들어가 볼까. 나는 뜨거운 녹차가 마시고 싶어져서 가스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 놓으며 혼자 생각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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