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과 예술]텔레비전 정원

  • 입력 1999년 9월 30일 19시 42분


텔레비전은 위력적이지만 알고 보면 그 뒤에는 그늘도 있다. 텔레비전도 공격당하는 경우가 많기때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텔레비전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배척 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중은 아직도 텔레비전에 대한 적절한 공격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텔레비전이라는 마약에 이미 중독되고 길들여져 숭배의 감정이 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그 속성을 따지고 드는 부류는 전문 지식인이나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예술가들은 텔레비전이 별로 유기적이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곧잘 텔레비전을 공격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양해되는 일들이었다. 예술가들의 예술적 행동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다.

미국의 비디오예술가이며 설치미술가인 댄 그레이엄은 이미 70년대 초에 상업텔레비전을 향하여 “이제 가공된 인공 텔레비전은 제발 그만… 자연TV를 달라”고 절규하는 퍼포먼스를 행하였다. 그레이엄이 말하는 자연텔레비전이란 상업텔레비전내용 대신 비디오를 이용하여 대중 자신이 만드는, 또 편집되지 않고 광고에 물들지 않은 텔레비전내용을 말한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미국에서 활동하던 정치적 성향의 비디오예술가 집단들은 상업텔레비전의 교묘한 편집태도, 대중접근을 용납하지 않는 거만한 태도를 비난했다. 그들은 대중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비디오를 사용하여 직접 그대들의 텔레비전을 만들라, 아주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텔레비전을.”

아마도 미국의 텔레비전을 비롯한 당시의 매체들은 이러한 주변의 참여와 제안, 간섭에 의하여 상당한 외부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백남준은 당시 예술가들이 외치던 자연텔레비전이라는 개념에 관하여 좀 다른 접근을 시도하였다. 예술의 이름으로 무조건 공격하거나 억압하기보다는 이른바 비자연적인 텔레비전을 치유하는 ‘치유의 예술’을 통해 텔레비전을 자연친화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비디오가 기계이며 인공적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토대로 하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텔레비전 정원’(TV Garden)이다.

‘텔레비전 정원’은 미술관이나 화랑내부의 전시공간에 식물을 이용한 숲을 만들고 그 속에 다수의 텔레비전을 배치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텔레비전으로 만든 정원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모니터에는 미리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글로벌 그루브’ 등 다양한 작품이 방영되었으며 이 작품은 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그의 대형 전시회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였다. 간단한 아이디어가 이렇게 백남준의 역사적 작품이 된 것은 미술전시장에다 자연을 유입시키고 숲을 만드는 기상천외한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텔레비전과 정원을 연결시키는 백남준 식 착상이 자연텔레비전의 원조가 된 것이다.

백남준의 이 작품은 기술을 자연화, 정보화, 인간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전시장 내부를 가득 메운 열대식물이나 나무, 그 식물과 나무 사이에 전시된 20∼30개의 텔레비전, 정원과 식물 사이를 거니는 관객, 그리고 관객을 위한 벤치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전시공간은 마침내 기계문명과 정보의 긴장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은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 작품은 몇 가지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째는 텔레비전이 옥내를 떠나 옥외공간에서 등장하며 식물과 섞임으로써 기계적이고 딱딱하다는 느낌을 덜고 자연적인 분위기 속에 나타난 것이다. 둘째, 텔레비전의 영상이 부분적이면서도 주변적 요소로 변형된다. 관객은 집안에서 늘 숨죽이는 수동적 관전자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편안히 텔레비전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셋째, 텔레비전 기술은 자연과 섞이면서 자연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이른바 테크놀러지의 자연적 환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자연텔레비전은 시간기조에서 벗어나 무 시간성, 또는 대자연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 기능과 성격의 대 변신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관객은 특정한 위치와 장소에서 늘 위압적으로 고정되어 있던 텔레비전을 벗어나 바닥에 전시된, 즉 눈 높이 아래에 전시된 텔레비전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손쉽게 외면할 수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할 수도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게 된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1974년 뉴욕의 보니노화랑 개인전에서 ‘하늘을 나는 물고기’와 함께 처음 전시할 예정이었으나 텔레비전과 열대식물을 구할 경비가 없어 대신에 ‘TV 부처’를 전시하였다. 이에따라 본격적인 ‘TV 정원’은 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에 등장하였다. 당시 전시회의 큐레이터 존 핸하르트는 전시 서문에서 이 작품에 대해 “텔레비전 세트가 매우 유기적으로 기능하여 자연 속에 묻혀버린 독특한 경우”라고 평하였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백남준의 ‘텔레비전 정원’은 기계문화와 자연주의를 병합시키는 하나의 논리적인 서술일 뿐이다. 아무리 텔레비전을 식물과 함께 전시한다고 해서 자연에 동화된 식물텔레비전이 되겠는가. 이 작품은 백남준의 또 하나의 이상주의적 화두이다.

‘텔레비전 정원’ 이외에 백남준이 시도한 자연주의 정신은 그의 72년 작품 ‘TV 첼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 3대를 이용하여 첼로의 모양을 만든 것으로 첼로의 원래 음정 대신에 전자음이 나도록 제작되었다. 첼로의 형태는 두 개의 큰 텔레비전 사이에 한 개의 작은 텔레비전을 수직으로 끼워 만들었으며 3개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은 모두 전면을 향하도록 되어있다.

‘TV 브라’, ‘TV 안경’ 등과 함께 백남준의 퍼포먼스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처음에는 첼로의 줄이 한 개밖에 없었으나 다음 작품부터는 3개로 늘어났다. 이 작품은 1963년 그의 첫 비디오 전시회인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에서처럼 ‘음악’과 ‘전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예술을 낳게 된 것이다. 기계문명의 소산인 텔레비전은 유기적인 음악과 만나면서 새로운 부활을 경험케 된 것이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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