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규민/사외이사제 虛와 實

  • 입력 1999년 9월 29일 18시 40분


미국에서 벤처기업 유리시스템을 창업해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김종훈회장이 2년전 이 회사를 뉴욕증시에 상장했을 때 투자자들은 두번 놀랐다.

‘미국을 통틀어 최근 5년간 가장 빨리 성장한 기업’을 만든 신화의 주인공이 약관 30대의 젊은이라는 점도 그랬지만 투자가들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윌리엄 페리 전미국방장관(현 대북정책조정관)과 제임스 울시 전미중앙정보국(CIA)국장을 비롯해 전직 미재무부고위관리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회사의 이사진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투자자들이 ‘경악’했다고 보도했다.

학계 금융계 하이테크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유리시스템의 황금멤버 이사진은 이름값만 챙겨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적절히 견제하고 정교하게 방향선택을 해 주는 나침반같은 존재”라는 것이 김회장의 사외이사에 대한 시각이다.

국내에서도 환란을 겪으면서 기업총수의 전횡을 막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외이사제의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의 방안은 이사회의 50%이상을 사외이사로 하고 이사후보추천도 사외이사가 주도하며 감사기능까지 사외이사에게 주도록 한다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과연 정부방침대로 사외이사진이 구성되고 권한이 주어질 때 우리기업들이 유리시스템처럼 효율적이고 모범적인 이사회를 갖게 될까.

대답은 한마디로 ‘글쎄올시다’이다. 일찌감치 정부안과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정부투자기관의 사외이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내린 결론이다.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위에서 찍어 내려보낸 인물을 어김없이 기관장으로 선출해야 하고 안건 처리때 눈치없이 원칙을 강조하다가 “좋은게 좋은 것 아닙니까”라는 충고를 들어야했던 이들은 정부투자기관의 사외이사제에 회의적이다. 이런 정부가 지금 민간기업에 엄격한 사외이사제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그러니까 기업총수의 사외이사 선임권을 제한하자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만일 그렇게 해서 구성된 비전문적 비우호적 사외이사들이 사사건건 기업경영에 발목을 붙들기라도 한다면 그 회사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감사기능까지 부여할 때 이사회는 이미 상법상의 의사결정기구가 아니라 막강한 권한을 갖는 총수 감독기구로 등장한다. 이 기구의 전횡은 도대체 누가 견제할수 있다는 얘기인지 정부안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에 대한 해답은 없다.

그렇다고 사외이사제를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기업의 전근대적 지배구조를 바꾸는 다른 대안이 마땅히 없다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들에서 효력이 입증된 이 제도를 마다할 수는 없다. 단지 지금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만든 제도를 강압적으로 기업에 요구할 때 후유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미 대다수 전문가들이 정부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그 내용과 절차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재벌총수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지배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사외이사제의 도입 목적이라면 차제에 우리 사회에서 전근대적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데가 기업뿐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정치가 민주적 절차나 법적 제도보다 어느 특정인의 독단적 결심에 의해 좌지우지될 때 그 폐해는 일개 총수의 전횡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사외이사를 둘 수 없는 곳이 정치판이다. 사회조직전체의 전근대적 지배구조가 바뀔 때에 기업의 사외이사제 또한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규민<부국장대우 정보산업부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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