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32)

  • 입력 1999년 9월 29일 18시 40분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영태가 피곤해서 그러는줄 알았지 무슨 낌새가 달라졌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어떻게 남다른 느낌이나 인상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 국밥이 나왔고 반주할 소주도 잔과 같이 올라왔다. 영태가 묵묵히 내 앞에 잔을 딱 놓고나서 술병을 기울이려고 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잔을 덮으며 말했다.

싫어, 가서 그냥 잘래.

딱 한 잔만 해. 나 혼자 마실테니까.

하는 수 없이 나는 잔을 받았고 그도 제 잔에 술을 따르더니 내게는 들라는 시늉도 없이 한번에 벌컥 하고 털어 넣었다. 나는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다가 내려놓고 해장국 국물을 떠 넣었다. 영태는 순대국 건더기들을 먹성 좋게 퍼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간이 뚝배기에 입을 대고 요란하게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국물을 마시고 또 한편으로는 술을 자작하여 단숨에 마시고를 되풀이 했다. 요란하게 잘 처먹는구나. 나는 밤참 체질이 아니어서인지 입 안이 깔깔하고 밥알이 넘어가지 않아 국물만 숟가락으로 떠 마셨다. 영태가 먼저 식사를 끝내고 수저를 놓았다. 그는 병 바닥에 남아있던 소주를 마지막 방울까지 짜내듯 따라서 앞에 놓고는 이번에는 한 모금씩 아끼면서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는 했다. 내가 수저를 놓고 보리차까지 마시자 영태가 담배를 내밀어 주고 라이터에 불을 켜서 붙여주기까지 했다. 그는 자기도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는 잔에 반쯤 남아있던 소주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더니 아끼던 짓이 이제 막 끝났다는 것 처럼 탁, 하고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저게 왜 저러지. 영태가 이번에는 나를 뚫어지게 마주 보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한 형, 날 어떻게 생각해?

보통 때 같았으면 초전박살이라고 아예 그런 분위기를 잡지도 못하게 우악스러운 욕이나 농담으로 입을 막았을텐데 아까부터 그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냥 잔잔하게 웃는 표정을 짓자. 나는 공연히 차림표가 붙은 더러운 벽을 올려다 보며 되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할 거 같니?

그랬더니 이 녀석이 갑자기 탁자를 세게 두드렸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허 기가 막혀서 이젠 성질까지 부리네 하는 얼굴로 픽, 하는 입 시늉을 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해보였다.

너 고거 먹고 벌써 취했니?

우리가 만난지 일년 거의 되어가지….

혼자서 입 속으로 중얼중얼 하더니 송영태가 불쑥 말했다.

나, 한 형한테 정 들었다.

점점 유행가쪼루 나올 거야? 것보다 한 형 소리 좀 뺄 수 없어?

너 좋아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정말 그 친구라도 없었으면 진학 하고나서 얼마나 생소하고 심드렁한 시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일부러 어긋나게 말해 버렸다.

임마 나두 널 좋아해. 하지만 너하구 그 이상은 절대루 안할 거니까 두 눈에 라이트 꺼라 응?

나 먼저 간다.

하더니 영태는 벌떡 일어나서 계산하고 국밥 집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나는 잠깐 더 앉아서 남은 담배를 다 피웠다. 꽁초를 사기 접시에 비벼 끄고 밖으로 나왔더니 시장통에는 벌써 좌판이 벌여지고 있었다. 나는 내 화실로 돌아갔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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