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어느 일선검사의 고백

  • 입력 1999년 9월 17일 18시 21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가 실시된다는 것은 검찰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특검제는 누가 불러왔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검찰 자신이랄 수밖에 없다.

왜 불러왔나? 이에 대한 대답을 들을까 하여 일선 검사를 한 사람 만났다. 서울에 근무하는 이 고참 평검사는 익명을 전제로 입을 열었다. 이 검사는 일선 검사를 대표해서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검사가 평범한 사견을 털어놓는 것임을 강조했다.

―특검제가 왜 왔다고 보나.

“검찰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결과다. 정치인들이 판사는 무서워하지만 검사는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검찰은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만 통하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검찰이 불신을 초래한 것은 전체사건 중 1%에 불과한 정치적 사건, 권력이 개입한 사건 때문이다.”

―옷로비사건이나 파업유도사건은 검찰수사가 속시원하게 파헤치지 못해서 특별검사가 다시 수사하게 된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사건의 본질보다는 수사절차상의 문제때문에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더 크다고 본다. 옷로비사건의 경우 고소인인 연정희씨(김태정전법무장관 부인)를 소환할 때나 귀가시킬 때 왜 대역을 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과잉보호를 했는지 모르겠다. 전임 총장의 부인이 아니고 평범한 고소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했겠나.”

―검찰이 불신을 사게 된 원인이 전적으로 검찰내부에 있다고 보나.

“내부와 외부에 책임이 똑같이 있다고 본다. 권력을 가진 쪽에서는 검찰권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요즘은 통치권을 뒷받침하는 두 축이 검찰과 국세청이다. 국정원(전 안전기획부)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보다 약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검찰과 국세청의 비중이 높아졌다. 권력쪽에서는 자기들 말이 제대로 먹혀들게 하자니 중요한 자리에는 ‘믿을 만한 사람’을 앉히게 된다. 이런 현상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더욱 심하고 서두르는 감이 있다. 인사를 당하는 검사의 입장에서는 이른바 좋은 자리에 가려면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된다. 말도 잘 들어야 한다. 이 현상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 심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사건, 권력이 관심을 가지는 사건은 권력의 입김을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사회 최고의 엘리트인 검사들이 왜 그렇게 ‘자리’에 연연하나.

“나름대로 보람있는 일을 하고 그럴듯한 사건을 맡으려면 ‘좋은 자리’에 가야 한다. 특별수사부나 중앙수사부 같은 데 가야 뭔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속된 말로 이름도 날린다. 꼭 매명때문은 아니지만. 이젠 외부 사람들도 어느 부에 근무하는 검사냐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이게 세태다.”

―그렇다면 검찰은 영원히 권력의 압력을 뿌리치기 어렵단 말인가. 개선될 여지는 없나.

“쉽지는 않겠지만 나아질 수 있는 요인이 없는 게 아니다. 첫째, 의식있는 젊은 검사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년초 심재륜고검장 성명파동 이후 젊은 검사들의 목소리에 총장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둘째, 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사건을 원칙에 어긋나게 처리했다가는 정권교체가 되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셋째, 검찰로서는 역설적인 얘기지만 특검제가 도입된 것이다. 정치적 사건이나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건을 잘못처리했다가는특검제로넘어간다는 인식을 상층부에서 갖게 됐을 것이다.”

―이번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회장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쪽의 불구속압력이 심했던 것 같은데 사실인가.

“그것은 감으로, 분위기로 안다. 청와대에서 국가정책에 따른 수사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몰라도 구체적 사건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된다. 경제논리도 일리가 있지만 그런 것을 포함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주임검사다. 수사검사들은 정치권에 눌리는 것도 그런데 재벌한테까지 눌린단 말이냐고 흥분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수사팀이 외부압력을 뿌리치기 위해 여러 가지 묘안을 짜낸 것으로 안다. 그리고 주임검사가 결정할 문제를 대검에서 간부회의까지 열어 논의했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대통령의 법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김현철씨 사면이 대표적인 예인 것 같은데….

“정치논리가 법의 논리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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