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원정/'열린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 입력 1999년 8월 12일 19시 27분


고등학교 시절,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세계지도는 우리의 것과 모양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아메리카 대륙이 왼쪽에 놓이고 유럽이 한복판을 차지한 그 지도에서 한국과 일본은 당연하게도 제일 오른쪽 귀퉁이로 밀려나 있었다. 그제야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을 가리켜 극동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 대륙을 가운데 앉혀놓은 우리 식의 세계지도를 보고 서양인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보이지 않게 쓴 웃음을 짓지 않을까.

이렇게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서 같은 세계지도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면지도의 경우일 뿐이다. 둥근 지구본의 세계지도에는 그런 변형이 있을 수 없다. 평면의 지도에는 중심부와 주변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지구본은 그렇지 않다. 지구본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모든 나라, 모든 인종, 모든 민족이 저마다 지구의 중심임을 지구본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 하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난 날 보여준 일본인들의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에 지금까지도 치를 떨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국수주의도 결코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원래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대개 그렇고, 외침에 시달린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또 대부분 그렇다지만 외국인에 대한 우리들의 배타적인 감정과 민족적 우월감은 조금 도를 넘어선 듯한 느낌이 있다.많은 예를 들 것도 없다. 화교들의 경우만 살펴보아도 상황은 명백하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화교자본이 생겨나지 못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우리 한국이 아닌가. 우리가 어렸을 때는 주위에서 화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전국 주요 도시의 어디에나 화교 학교들이 있었고 화교들이 경영하는 진짜 중국집들이 저마다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모습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2만여명의 화교들이 국내에 거주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게 되어버렸다.

지구상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화교들이 유독 이 땅에서만 번영을 누리지 못한 데에는 토지소유권 제한 등 여러 가지 제도적인 어려움이 있었다지만 정서적인 문제도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동화하려는 노력을 덜했다기 보다는 우리가 먼저 거부해버린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도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중에는 경제적 심리적으로, 심지어는 신체적으로까지 한국인들에게 받는 차별대우와 학대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엘리트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만 경제사정이 우리만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일들이 이 땅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다면 그런 민족감정, 그런 우월감은 비열하기까지 한 것이다.

더구나 일본인들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대우나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 언행에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 항의를 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 혹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지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민족감정으로 똘똘 뭉쳐서 현지인들과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한 나머지 ‘어글리 코리안’이란 손가락질을 받곤 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투철한 민족정신은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민족주의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의 자존을 침해받지 않을 만큼 남들의 명예 또한 존중해줄 수 있는 열린 민족주의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평면지도를 보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둥근 지구본을 보는 가치관으로 우리와 세계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20세기에서는 마지막이 될 이번 광복절에는 ‘흙 다시 만져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우리들의 전통적인 민족감정에 꼬이고 뒤틀린 구석은 없는지 차분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고원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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