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89)

  • 입력 1999년 8월 8일 18시 26분


기사가 앞서가던 그를 보자 얼른 운전석에서 내려 차 앞으로 돌아오더니 뒷문을 열고 기다리는 거예요.

타슈.

송영태가 과장된 동작으로 호텔 문지기처럼 한 손을 쳐들어 휘익 내밀며 말했고 얼결에 나는 올라탔죠. 그가 내 옆에 들어와 앉자 차가 곧 떠났어요. 글쎄 잘 모르긴 해도 차 한 대 값이 웬만한 아파트 값만 하다는 독일제의 그 몹쓸 자동차더라구.

이건 무슨 뜻이죠?

기본모순에의 탐구. 잠깐 빌린 것이지만 그 임자의 것도 아니오. 그쪽도 훔친 거니까.

우리는 그 무렵에 근사하다는 무슨 호텔의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지요. 심야에 무슨 사람들이 집에도 안가고 그렇게나 많던지. 그와 나는 창 아래 별밭처럼 도시의 야경이 펼쳐진 창가에 가서 앉았어요. 술을 시켰고. 나는 아무 얘기도 없이 술을 홀짝홀짝 잘도 마셨어요. 술이 적당히 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그에게 내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봐 너 말야 까불지 좀 마라. 난 니가 어떤 놈인지 잘 알구 있어. 너 벼락부잣집 아들인줄 다 알아.

그랬더니 이 자식이 대꾸를 하는 거예요.

나두 오 선배 잘 아는 사람이라구.

니 따위가 수도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

한 다리 건너 아는 선배야.

나는 독한 심정이 되어서 자꾸 내뱉었지요.

너 내 앞에서 시건방 떨지마라. 정희한테서 다 들었어. 느이집 땅 부자라매?

그가 의외로 순순히 기를 죽이고 말하더군요.

건 내께 아니야. 윤희씨, 나는 그저…지식인이 되어 보려는 사람이라구.

지식인 좋아하네 개새끼. 느이 아부지 유신 때 뺏지도 달았다면서?

그가 갑자기 탁자를 쾅 내려치면서 평소처럼 더듬지도 않고 속사포로 내뱉었죠.

그래 이년아. 인텔리는 계급을 선택한다. 내 원죄를 따지는 거야?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리곤 남은 술을 냉수 마시듯 대번에 입 속에 털어 넣고는 일어섰지요. 핑글 돌면서 다리가 좀 풀린듯한 느낌이었지만 뒤꿈치에 힘을 주고 꼿꼿이 걸어서 엘리베이터에까지 갔습니다. 그가 뒤통수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마 그는 창가에 그대로 앉아 있었겠지요. 나쁜 자식, 다시 나타났단 봐라. 괜히 어눌한척 하면서.

나는 무슨 정신으로 내 화실에 돌아왔는지 몰라요. 화실에 들어서자마자 모차르트 걸어 놓고 냉장고에서 맥주 꺼내 들고 방에 들어가서 혼자 더 마셨지요. 그러다가 유리잔을 쥔 내 손이 보이고 손가락 끝의 손톱이 보이고 손톱 아래 끼어있는 검붉은 물감의 때를 보았죠. 나는 술김에 그게 피가 아닐까 착각했어요. 혹시나 얼김에 내 몸의 어느 곳을 긁어 상처를 내지나 않았나 하구요. 그러다가 잤어요.

송의 이야기가 길어져서 점점 귀찮은데 하여튼 나중에 알고보면 그에게도 장점이 많았거든요. 그는 나의 유일한 남자 친구였고. 바보 같은 녀석, 그는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지만요. 광주가 꼼뮨이 되지못한 것과 같이 팔십년대 인텔리의 숙명이라고? 그 해 여름 대초원의 황량한 벌판 너머로 지던 노오란 해가 생각나요. 녀석의 멀고 먼 길을 돌아가던 긴 여행이 생각나는군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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