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44)

  • 입력 1999년 6월 16일 19시 07분


저녁 드시구 가요.

바람은 많이 그쳤지만 비는 참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는데 부옇게 저녁 박명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다른 날과는 달리 성큼성큼 어두워졌지요. 내가 당신을 하루라도 더 붙잡아 놓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건 당신도 잘 알잖아요? 밭에서 캐어둔 햇감자와 여름내 무성했던 넝쿨에서 따온 호박에다 밭에서 따온 풋고추 썰어넣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우리가 좋아했던 간고등어를 무와 고춧가루로 얼큰하고 맵짜게 조림을 하고, 아랫집에서 얻어온 된장에 박은 깻잎과 내가 담근 열무김치를 내놓았지요. 짭잘한 고등어 조림과 열무김치와 물에 만 밥은 당신 말대로 참 궁합이 잘 맞지요. 나는 엄마의 버릇대로 고등어의 안쪽이 보이도록 놓는데도 당신은 언제나 등쪽의 껍질과 검은 살이 보이는게 더 먹음직스럽다고 뒤집어 놓곤 했잖아요.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순도순 저녁을 먹었고 갑자기 정전이 되어 양초를 두 개나 켰는데도 어둠이 금방 눈에 익질 않았어요. 그러나 초를 켜니까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어딘가 멀고 먼 두메 산골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던 것처럼 아늑해졌어요. 잠시 후에는 당신을 보내고 빈 방에 누워서 촛불이 다 사그라지도록 새울 터인데도 말입니다.

그게 어디 있어요?

당신이 갑자기 낯선 사람 같이 존댓말로 내게 물었어요. 물론 나는 당신이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작별 전에 슬퍼질 나를 존중해 주려는 태도임을 모르진 않았습니다.

책갈피에서 보았는데….

뭘 찾아요?

그 증명사진.

싫어요, 이상하게 나왔어요.

당신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서 손가락으로 책들을 더듬어 보다가 네루다인가 하이네인가 어느 시집 갈피에서 내 반명함판 사진을 찾아내고야 말았죠.

아, 찾았다!

나는 굳이 빼앗으려 하지않고 순순히 당신에게 내주었습니다. 당신은 사진을 지갑 속에 챙겨 넣자마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방문 앞에 내가 챙겨 두었던 당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어요. 나는 무력하게 당신의 뒤를 따라 나서려다가 봉당 겸 내 작업실로 내려가 손전등을 찾아냈어요. 그리구 우리가 함께 쓰고 갈 우산을 챙겨내고요. 방으로 다시 올라와 촛불을 불어 끄니까 어둠이 한꺼번에 우리 주위를 뒤덮었어요. 당신은 우산을 받쳐든채 묵묵히 걷고 나는 당신의 우산 든 팔뚝에 매달린듯 걸으며 손전등을 당신의 앞으로 비춰 주었지요.

빗줄기가 내 고무신 신은 맨발 위에 차갑게 떨어졌고 낯익은 당신의 구두에 떨어지는게 공연히 또렷하게 보이는 거예요. 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은 무슨 난쟁이 괴물들처럼 사방으로 팔 다리를 떨면서 서있었구요. 갈뫼의 들머리가 시작되는 다릿목에서 당신이 자유로운 다른 편 팔로 내 머리를 감싸안더니 길게 입을 맞추었어요. 우리는 둘 다 입술이 차가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거요. 곧 돌아올게.

기가 막혀서, 곧 돌아온다니. 그래도 그때에는 내년 내후년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 같았어요. 마지막 버스의 앞등 불빛이 꾸물대며 개천 옆의 신작로를 따라서 다가오는 게 보이더군요. 나는 얼른 생각이 나서 끼고 있던 반지를 당신 손에 쥐어 주었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당신은 차에 오르기 전에 잠깐 내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손목만 쳐들어 흔들어보였구요. 버스의 창문은 어둡기만 해서 그냥 시커멓게 보일 뿐이었어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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