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명구/「옷 로비」사건의 교훈

  • 입력 1999년 6월 3일 19시 53분


연정희씨는 피해자다. 고급 옷로비는 실체가 없었다. 전 통일부 장관 부인이 벌인 미수극이었다. 검찰은 이렇게 발표했다. 대통령은 범법이 없었으니 법무장관은 성실하게 일하라고 격려했고 범법도 없었는데 ‘획기적인 공직기강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나는 이번 사건이 김대중 정권이 마주친 가장 큰 정치적 위기라고 생각한다. 장관 부인들이 고급옷 쇼핑이나 하고 돌아다녀 문제가 아니라, 사건을 처리하고 인식하는 방식이 위기를 불렀는데도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으니 정말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나는 몇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됐고, 이런 깨달음이 위기극복에 조그만 보탬이 됐으면 한다.

▼현정권의 정치적 위기 ▼

첫째,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사건 처리에서 작은 원칙은 지켰는데 큰 흐름을 놓쳤다. 대통령은 장관이 법을 어긴 일이 없으니 여론몰이식 사임은 안된다고 했다. 이 점은 잘한 일이다. 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부인이 사치하고 로비받은 혐의가 있다고 해서 남편인 장관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태정 장관에 대한 인사가 잘못됐다는 주장은 정당하지만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인이 사치했다거나 확인되지 않은 로비의혹을 가지고 물러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 이런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검찰수사가 ‘유리 속을 들여다보듯’ 투명했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런데 아무도 검찰의 수사발표를 믿지 않는다. 청와대를 제외하고 모두가 짜맞추기 수사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대통령은 검찰에 재수사를 지시하거나, 이런 계제에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한다. 이것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재수사 요구나 특별검사제, 부패방지법 등을 민심수습용으로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민심은 누가 다스리고 수습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마치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일이 민심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하는 일처럼 보이게 만든다.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정치행위이고, 국민은 이것을 감시하고 평가하며 또 그런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겠다고 요구할 수 있다. 검찰개혁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으며 사직동팀과 같은 비선조직도 해체해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러한 정책 실행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국민과 정부가 그것을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것이다. 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지금까지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金대통령 현실 직시를 ▼

셋째, 상류계층의 호화사치 생활과 그에 대한 국민일반의 반감. 현직 장관 부인들은 고급의상실에서 고가의 옷을 쇼핑하고 다녔다. 물론 자신들의 돈으로 샀다고 믿는다. 대다수 국민이 여기에 분노하고 있다. 나는 이런 분노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나도 뉴스를 보면서 정말 화도 내고 욕도 많이 했다. 그러나 분노를 사회적으로 수렴하는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자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비난하고 허탈해 하면 스트레스는 좀 풀릴지 몰라도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감춰진다. 탈세와 부패, 불로소득을 누리는 5% 계층에 종합소득세를 면제해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관료와 정치인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정치개혁법 부패방지법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우리는 동참하고 있는가. 분노를 정치인이 달래주길 기대하지 말고 그런 정치를 만드는 몫이 시민의 책무인 것이다.

넷째, 이미 지적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의 정보보고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대통령이 몽골에서 돌아오기 이틀 전 여론조사를 해서 언론이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순발력을 갖췄는지는 모르지만 국정운영의 핵심방향을 판단하고 보좌하는 능력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보여줬다. 유종근 전북지사 사건처리도 그랬고 3·30 재보궐선거 비용 50억원 지출을 보도한 한겨레신문 고소사건도 그랬다.

대통령이 원칙에 충실하면서 큰 정치적 흐름을 다시 읽어주기를 기대한다.

강명구<서울대교수·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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