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29)

  • 입력 1999년 5월 30일 19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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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 되었을 때였으니까 아마 유월 중순이 넘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갈뫼의 맞은편 언덕을 넘어서 있는 우리들의 웅덩이에 찾아가 낚시질하는 재미에 들려 오전 나절이나 저녁 해 지기 전에 찾아가곤 했다. 처음에는 뒤뜰의 축축한 땅을 파헤쳐 지렁이를 잡아다 미끼에 썼지만 윤희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길에 읍내 낚시점에서 원자탄 떡밥을 사다 주어 그걸 개어서 썼다. 따로 새우 가루를 빻아 섞기도 하고 어떤 날은 구더기를 잡아다 맑은 물에 헹구어 가져가기도 했다. 나는 차츰 고기가 많이 몰리는 목을 몇 군데 알게 되어 제법 씨알이 굵은 참붕어들을 낚았다. 한 뼘 반쯤 되는 메기를 낚아 올린 적도 있었다.

그날도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낚싯대를 메고 언덕을 넘어갔다. 흐린 날씨였는데 바람이 불지않고 수면이 잔잔해서 찌를 살피기에 좋았다. 나는 앉자마자 모래무지 한 마리를 낚았다. 이 녀석은 성질이 급해서 잡아 올리자마자 뻣뻣해지며 죽어 버렸다. 그러고는 거의 열 한 시가 될 때까지 피리 서너 마리 올라 오더니 그뿐이었다.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아무래도 날씨가 비가 올듯한 게 심상치를 않아서 걷고 일어났다. 언덕을 넘어서 과수원 사이로 해서 집으로 오르는 갈래길에 들어서는데 나무들 사이로 누군가가 자전거를 옆구리에 끌고서 먼저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게 놀려 그의 뒤로 쫓아 올라갔다. 누런 점퍼를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았으며 아래는 예비군 군복 바지를 입은 사내였다. 아랫집 교감 선생네로 가는가 싶었는데 그는 그 집 앞을 지나쳤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그의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다. 역시 그는 우리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서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계십니까. 누구 안계시오?

나는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잠깐 생각했다. 이런 경우를 위한 아무런 대비나 준비도 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윤희와 입을 맞추어 놓은 바가 없었고 교감 선생네 식구들에게는 막연하게 내가 한 선생의 약혼자라는 식으로 말해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고작 내가 아직 직업이 없는 까닭이 몇 년 동안 고시공부만 해왔던 탓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 이 사내를 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얼른 울타리에서 멀어져 과수원의 나무들 사이로 몸을 굽히고 들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잠시 마당 안에서 서성이던 사내가 자전거에 올라 천천히 브레이크를 잡고 속도를 늦추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는 아랫집의 울타리 앞에서 멈추었다. 그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사모님 안녕하시오. 교감 선생님 학교 가셨지라?

예, 그란데 여그는 어짠 일로 오셨어라우.

저 웃집에는 누가 산답니까?

누가 살긴…여고 미술선생이 세 들어 사는디.

머 남자도 있다구 하더만요.

이잉, 그니가 약혼자여. 고시공부를 하러 내레왔다는디 시방 몸도 안좋답디다.

요양차 왔그만이라?

아먼, 몸도 고치고 공부도 한답디다.

한번 얼굴을 보기는 보아야 쓰것는디. 언제나 오면 만날 수 있으까요?

저녁참에나 와 보소.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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