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25)

  • 입력 1999년 5월 25일 18시 39분


나팔꽃, 분꽃, 채송화, 봉숭아, 그리고 백일홍에 코스모스 과꽃까지 뿌렸어요. 이제 우리는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그 꽃들이 차례로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을 가지게 될 거였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메마른 흙을 뚫고 맨처음 새싹이 돋아 나올 때 그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게 그냥 잡초의 싹인지 뭔지 모르는채로 한 두어개씩 돋아 나왔다가 아마도 제 동료들에게 ‘얘들아 이제는 나와도 괜찮단다’ 하고 속삭인 것처럼 이튿날이면 무수하게 여기 저기 싹들이 돋아 나옵니다. 그냥 잔잔한 바람이나 실비에도 짓뭉개질 것만 같은 투명한 연두색의 떡잎들은 형상 전체가 시간이어요. 며칠만 눈을 돌렸다가 밭고랑에 나가 보면 어느 틈에 모양이 달라질 정도로 쑥쑥 자라나 있지요. 당신은 아침마다 양동이와 조리를 들고나가 밭에다 물을 주었구요.

드디어 초여름이 되었을 때엔 밭은 풍성한 푸른 잎으로 가득차게 되었지요. 우리가 첫 번째로 상추를 따다가 점심을 먹었던 일 생각나셔요? 아직 잎이 다 자라지는 않았지만 손바닥 반만큼씩은 되었죠. 두세장을 겹치면 밥을 그득히 쌀 수가 있었지요. 여린 잎에 쌈장을 묻혀서 입에 넣으면 생명의 향기가 가득차는 것 같았어요.

나는 당신이 텃밭을 돌보는 모양을 마루에 앉아서 지켜 볼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농부들은 아마도 모두가 시인이 되어버릴 거예요. 쑥갓에 붙은 벌레를 잡거나 달팽이를 집어내고 진딧물을 털어낼 때에도 상하고 죽지 않도록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뭇잎 위에 올려 놓았다가 멀찍이 내다버리던 당신이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쁜 일도 겪지 않을 것이고 하늘에서도 잘 보살펴 줄 것 같은 편안한 마음이 들었죠. 도시에서 놀러온 사람들은 산촌의 정적과 언제나 변하지 않는 풍경에 며칠 못가서 진절머리를 내고 제풀에 지쳐서 달아나 버려요. 하지만 눈을 뜨고 자세히 둘러보면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중이어요. 풀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가는 바람에는 포르르 잔바람에는 살랑살랑 거센 바람에는 휘청휘청 눕거나 펄럭이어나 몸부림을 치지요. 풍경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가 그냥 고여있는 듯한 정적 가운데서도 느닷없이 풀숲으로부터 메뚜기나 방아깨비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 길 건너편으로 가로질러 가요. 개구리가 논두렁에서 물 속으로 퐁당 뛰어들기도 하구요. 갈뫼의 여름은 살아있는 것들의 대합창이 연주되고 있는 듯했지요. 아랫집에서 얻어 온 마른 쑥에 모깃불을 지펴놓고 매캐하고 향긋한 쑥 타는 연기에 둘러싸여 마당에 멍석 펴 두고 당신과 마주앉아 호박잎 쌈으로 저녁을 먹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그 뒤의 석 달 동안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게 되었지만요. 우리에게는 그 여름 한 철이 두 사람의 모든 인생이었어요. 그 때는 어쩌면 그렇게 소나기가 자주 내렸던지. 검은 먹장구름이 뭉실거리며 산봉우리를 스치고 몰려오기 시작하면 당신은 울타리를 돌아 들어오면서 외쳐요.

비 온다, 빨래 걷어야지.

내가 고무신 꿰어 신고 마루에 내려서는데 벌써 후두둑 하면서 굵은 빗방울이 머리며 팔에 그리고 마른 땅바닥에 떨어져요. 번쩍, 하는 섬광이 하늘을 긋고나서 사방을 깨어버리는 것 같은 우렛소리가 들려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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