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13)

  • 입력 1999년 5월 11일 19시 14분


박형 모두들 잘 사는지 궁금합니다. 그 때는 경황이 없이 떠나와 두고 두고 미안했습니다. 박형의 방에 ‘세상이 너를 속일지라도 두려워 하거나 노하지 말라…’하고 써두었던 달력의 글자도 이젠 떼어버릴 때가 왔군요. 그렇지만 그 글은 새 달력에도 꼭 옮겨서 적어 두기 바랍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참 그리고 맹순씨와 임 사장님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순옥씨를 비롯해서 명순씨 경자씨 모두 잘들 살고 있겠지요. 세상 어디서나 살아가기란 모두들 힘이 들고 팍팍하답니다. 하지만 지내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래도 즐거운 날도 있었고 여기까지 용케 왔구나 싶지요. ‘인간과 대지의 역사는 일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나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정을 하고나서 지방 수배자들을 관리하는 이웃 조직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지내는 도시의 겨울은 더욱 삭막하고 추웠다. 시대는 다시 거꾸로 가는 중이었다. 하나도 놀랄 것 없이 그가 대통령 후보와 신당의 총재로 추대되었고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지금도 마지막 구절까지 외우고 있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기사의 노래를 수첩에 적어 놓았다.

콜두에

멀고도 고적한 곳

검둥 말 큰 달

주머니에 올리브를 넣고

가는 길은 알지라도

콜두에에 이르지는 못하리

들을 지나 바람을 지나

검둥 말 붉은 달

죽음은 나를 보고 있는데

콜두에의 높은 탑에서

아아 얼마나 먼 길이냐

아아 귀여운 나의 말

아아 내가 콜두에에 이를 때까지

죽음이 나를 기다려 주면

콜두에

멀고도 고적한 곳

11

나는 그의 몸 구석 구석을 다 안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그의 살갗과 모발과 뼈의 윤곽들을 더듬을 때에도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기는 낯익은 땀내와 목의 불쑥 솟아나온 울대와 면도한 턱의 까칠한 감촉도 그리고 그의 음모와 성기까지도 다시는 떠올릴 수가 없어. 그것은 너무도 뚜렷한 현존이다.

어렴풋한 박명 속에서 나는 그의 팔을 벤채로 잠에서 깨어나 다시 그를 확인한다. 이제 그와 나의 같은 잠자리는 일상이 되었다. 꿈마저도 해석한 저 음울한 과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 박명의 순간은 억압된 개체가 깨어나는 순간이다.

나는 우리들 앞에 가로 놓인 불투명하고 악에 가득찬 시대를 용납할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의 배경처럼 두 사람의 등뒤에 드리워져 있을 뿐 전면에는 매우 또렷한 우리 두 사람의 윤곽뿐이다. 나는 머리 속에서 그 배경조차도 검은 물감으로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도 갖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 모든 감정을 주입해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다. 그게 낯익은 나의 이미지가 된다. 나와 그는 서로의 것이 되었다. 정말? 우리가 세상 속에서 영원히 유폐되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만이 숨어서 남게 되는 일이.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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