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파이어니어]설치미술작가 육근병씨

  • 입력 1999년 4월 13일 19시 50분


2000년 초. 한국의 대표적인 설치미술 작가 육근병(43)은 뉴욕 유엔건물 인근에 가로 7백m 높이 18m가 넘는 대형작품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 작품은 가로4m 세로3m의 스크린 1백85개에 1백85개국에서 찍어온 9세 어린이들의 눈동자를 비추는 것.

“유엔과 세계가 더 가까이 마주 보라는 의미로 이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한국인도 세계로 나아가, 한국인이 아닌 세계인이 돼야 합니다.”

육씨는 세계적인 미술제인 카셀 도큐멘타 총감독을 지낸 벨기에의 얀 후트, 리용 비엔날레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프랑스의 피에르 플라트 등과 함께 이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육씨는 “이를 위해 세 명의 작가지망생들이 각국을 돌며 어린이들의 눈동자를 찍고 있다”고 말한다.

육씨가 생각하는 21세기의 화두는 ‘디지털’과 ‘생명공학’. 컴퓨터로 인한 각종 생활의 변화, 유전자공학의 발달로 인한 생명연장 등으로 인간의 가치관이 크게 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변화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고 강조한다. “인생의 꿈과 희망은 시대가 변해도 지켜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술을 통해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요.”

다양한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기위해 육씨는 최근 영화작업을 시작했다. 서울대 컴퓨터신기술공동연구소에 연구실을 마련해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것. “문화산업 개발을 위한 서울대측의 배려로 연구실을 얻어 미술인의 새로운 시각과 감각을 담은 영화를 준비하고 있지요.”

제작 중인 영화는 고대 청동기시대가 배경. 각종 신화와 전설을 SF기법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낼 예정이다. 시나리오를 자신이 썼으며 감독도 직접 맡기로 했다. 프랑스와 폴란드 감독들을 만나 촬영과 연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구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미리 밝히면 흥행에 지장이 온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영화는 2000년 중반 개봉할 예정.

육씨는 앞으로 미술인들끼리 모여 시나리오부터 제작까지 다 해내는 영화사를 만들어 운영할 계획이다. 상업영화 예술영화 애니메이션을 모두 만들겠다는 포부. 이미 한 미대 교수로부터 예술영화 시나리오도 받아 놓았다.

경희대 재학시절 극사실주의 기법의 서양화를 그리다가 졸업 후 비디오 설치미술로 돌아선 그가 이제는 영화로까지 작업의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 “영화도 시각문화의 한 분야이고 넓은 의미의 미술입니다. 미술인들이 지닌 창의력과 예술적 감각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영화를 하는 것이지요.”

그는 92년 ‘제9회 카셀 도큐멘타’에 한국 작가로는 처음 참가했다. 카셀 도큐멘타는 2차대전 후 독일의 한 도시 카셀의 시민들이 미술을 통해 독일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마련한 미술제. 4년마다 열려 ‘미술의 올림픽’으로도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실험성이 강하고 치열한 예술정신을 추구하는 미술제로 정평이 나있다. 1회(55년)에 피카소와 몬드리안이 참가한 이래 세계적인 작가들이 몰려들어 미술제의 명성을 높여왔다. 육씨는 9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조각가 마이크 켈리(미국) 등과 함께 현지 언론으로부터 ‘새 시대에 주목받을 15대작가’에 선정됐다.

이 때 그의 출품작은 ‘풍경의 소리, 그리고 터를 위한 눈’. 높이 6m의 대형 무덤을 만든 뒤 이 무덤 속에 비디오모니터를 설치했다. 비디오모니터에는 꿈벅거리는 사람의 눈동자가 나온다.

‘무덤’과 ‘눈’은 그에게 중요한 소재. 초등학교시절 남의 집 대문에 뚫린 구멍에 눈을 대고 정원을 살펴 보던 재미를 되살린 것을 주요 모티브로 삼아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어릴 적의 경험을 생각해보니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꿈과 재미, 혹은 희망은 계속됨을 느꼈다. 그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죽어도 꿈과 희망은 죽지 않고 지속된다고 믿었다.

‘눈’은 보는 사람과 대상의 연결을, ‘무덤’은 과거를 각각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역사 속에 지속되는 ‘인간의 꿈’이 주제다. 또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서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무덤형상에 외눈박이 눈동자를 비추는 비디오를 설치한 작품으로 대학졸업 후 7년만인 88년 첫 개인전을 가졌다. 남들이 여러차례 개인전을 할 때 자신만의 세계를 찾기 위해 애써 참고 기다린 개인전이었다.

이 개인전의 성공으로 이후 ‘89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95 프랑스 리용비엔날레’에 잇달아 참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이같은 설치미술을 계속할 작정이다. “예술가는 항상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시대를 이끌어야 합니다. 21세기 과학시대를 예술적으로 이끌기 위해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설치미술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프로필]

△1957년 충북 옥천 생. 5남1녀중 네째

△81년 경희대 미술교육과 졸업

△83년 동대학원 졸업

△88년 갤러리 도올에서 첫 개인전

△89년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 참가

△9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참가

△93년 저팬 프로젝트 수행(동경 오사카 삿포로 3개 도시전체에 전광판 을 이용한 설치미술)

△95∼2005 일본 히로시마 하이스카댐 프로젝트. 수몰지구 인근에 7백 여개의 대지조형 예술물을 설치 중

△별명 ‘미스터 복서’(싸움꾼같이 치열하게 일한다는 의미)

〈이원홍기자〉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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