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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2월 24일 1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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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미전향 장기수 석방을 발표하자 북한은 폭넓은 남북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무조건 송환을 요구했다. 남한에서는 이를 계기로 미전향 장기수를 북에 있는 국군포로 및 납북자들과 교환하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 가능성적은 희망사항 ▼
미전향 장기수의 송환이 국군포로나 납북자와 교환하는 연계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여건을 고려해볼 때 그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 실현성이 매우 희박해 보인다.
남한의 미전향 장기수들은 말 그대로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아 장기간 투옥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석방이나 송환이 남한 체제에 미칠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 오히려 그들을 석방함으로써 남한 사회의 민주 역량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전향 장기수를 석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정부의 인도주의적 실천의지와 화해 노력을 보여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억류하고 있는 북한의 사정은 다르다. 북한이 ‘당위적으로 송환해야 할’ 국군포로나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할 리 만무하다. 만약 국군포로나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하면 북한은 휴전협정 위반자, 강제납북을 자행한 테러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제사회의 심각한 비난이 따르고 체제 안에서도 명분을 상실할 위기에 처할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일관되게 국군포로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실존하는 국군포로들은 결혼까지 한 ‘북한공민’으로 지난 수십년간 생활했다.
납북자도 동진호 선원을 제외하면 자진 월북자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결국 북한이 연계송환에 응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북한은 우리사회에서 연계송환 얘기가 나오자 즉각 거부반응을 보였다.
북한이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보내주고 돌려받아야 할만큼 미전향 장기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북한 입장에서 미전향 장기수들이 돌아오면 단기적으로 김정일 정권의 내부선전 효과가 크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송환 상태로 있더라도 지속적인 대남비방 호재로 이용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남북 관계에서 연계송환 구상은 당위적으로 바람직하나 현실적으로 정책적 적실성(適實性)이 매우 떨어지는 제안이다. 실제 우리가 이 제안을 하면 북한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대북정책의 초점이 흐려지고 남북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 부정적인 결과가 거의 확실한 제안을 굳이 해 대북협상력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현재 미전향 장기수의 송환문제는 북한 요구로 인해 미묘한 사안이 되고 있다. 이 사안을 잘 활용하면 남북관계를 크게 진전시킬 수도 있지만 자칫 정부가 곤경에 빠질 우려도 없지 않다. 이미 우리는 이인모 노인 송환에서 불쾌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물론 이인모 노인 송환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내외 여건을 감안하면 지금이야말로 이 문제를 인도주의 본연의 자세에서 풀어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한 큰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로 만들 수도 있다.
▼ 이산가족상봉 연계를 ▼
우리에게는 미전향 장기수들이 송환됐을 때 북쪽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약자의 몸부림으로 보아줄 여유가 아직은 별로 없다. 긴 분단과 냉전의 상흔이 아직도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체제의 건강성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가져도 좋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송환을 추진하되 협의과정에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감 있는 정책을 검토해볼 만하다. 보수적인 국민여론 때문에 송환이 어려워진다면 미전향 장기수들을 남한 사회에 적응시키면서 송환 분위기가 성숙될 때까지 신중하게 기다리는 것이 차선책이다.
인도주의적 정신에서 우러나온 조치가 때때로 가장 전략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다.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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