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곽배희/「해로」강요하는 무책임한 法

  • 입력 1999년 1월 6일 19시 41분


어제 아침 회의를 마치고 상담실로 돌아왔더니 대기실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억울한 일을 상담하러 왔다며 기다리고 계셨다. 그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최근 신문에 보도된 고등법원의 판결이 머리에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52년간 무조건 복종을 강요당하며 살아오다 견디다 못해 큰 딸 집에서 생활해온 아내를 절도죄로 고소한 남편. 그런 남편과 ‘해로’하라며 아내가 제기한 이혼 소송에 패소 판결을 내린 바로 그 법에 대해 무엇인가 묻고 의지하기 위해 또 다른 할머니가 상담소를 찾아오신 것이다.

이번 판결에 따르면 반세기 전 혼인 당시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남편의 무시와 순종강요는 이혼 사유가 안되며 그 남편이 아내를 고소한 것은 고령에 따른 정신장애이므로 아내는 남편을 부양할 의무까지 있다고 한다.

과연 오늘날 20, 30대에게 이런 내용을 강제할 수 있는가. 20, 30대에 강제할 수 없는 것을 60, 70대에게는 강제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은 것인가.

가치관의 내용은 세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연령과 성별을 떠나 모든 이에게 평등한 것이 법의 정의임을 믿고 싶다.

부부가 해로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두 사람이 인격적인 관계로 만나 함께 가족을 이루고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그렇다.

일방적인 복종과 무시, 억압을 50여년간 참고 견디다 하루 만이라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아내에게 법이 ‘해로’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판결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치매에 정신장애가 있는 노인을 돌볼 의무는 그 배우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성한 자식에게도 있고 이 사회에도 있다. 평생 억눌려 살아온 아내에게, 자기 몸 조차 편하지 않을 노인에게만 이 모든 의무를 법이 앞장서 강제하는 현실이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75세라는 나이에 ‘오죽하면’ 이혼소송을 제기했을까. 우리는 할머니의 그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패소했지만 할머니가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고 편안하게 여성을 누리시길 바라는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

곽배희<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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