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게임 (63)

입력 1998-09-29 19:08수정 2009-09-2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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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나에게 생긴 일 ⑥

―당신 때문에 내 인생에 혼란이 와. 나의 삶 전체가 흔들려.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지면, 끝장이야. 지금의 내 삶은 너무 창백하고 이기적이고 무가치하고 열등하고 게으르고 먼지 같아. 한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여자의 몸에서 내 아이를 낳고 날만 새면 튀어나가 돈을 벌고 한 밤에 가족이 잠든 집으로 돌아가 잠드는 이타적인 삶이 갑자기 전율이 일 지경으로 위대하게 느껴지는 거야.

―당신은 여전히 빈정대는군요.

―이젠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빈정거리는 거요.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어. 내 나이 사십에…. 인생은 그다지 길지가 않아. 혹 다시 태어나면 당신 같은 여자를 하나 만나 내 아이도 낳고 그 여자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을 그 곁에서 살아볼까…. 하지만 난 이 생을 믿지 않아. 근본적으로 생은 파괴적이지. 사랑하며 살도록 허용하지 않아. 난 그걸 오래 전에 알아버렸어….

그가 갑자기 나의 어깨를 물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털고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의 이빨이 깊숙이 더 깊숙이 내 살 속에 파고들도록….

―나도 당신 살을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식인 종족처럼….

―언제 만날까요? 약속을 해줘요.

나는 그가 채 끝내기도 전에 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물었다. 그가 긴 숨을 쉬었다.

―…. 모레, 그래. 모레 오후 3시 휴게소에서 만나.

오후 다섯 시였다. 온천 모텔 앞에서 규를 보내고 나는 숲의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대중탕이 있는 온천장으로 내려갔다. 차 앞으로 다가갔을 때, 꼬챙이같이 내 몸을 꿰는 팽팽한 시선을 느꼈다. 나는 의식적으로 발등만 내려다보며 걷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호경이 서 있었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호경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웃으려 해도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흥분했을 때면 늘 그렇듯이 호경의 눈 밑이 무섭도록 붉었다.

―거기서 뭐했어?

너무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화장이 함부로 지워진 나의 얼굴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두 눈이 공중에 멈춘 돌처럼 단단했다.

―산책.

―산책, 그냥 숲길을 걸었다고? 언제 왔어?

―….

호경은 나의 가방을 획 나꿔챘다.

나는 가방 끝을 쥔 채 황급히 말했다.

―…. 30분쯤 전에.

그가 헛, 하고 웃었다.

―난 3시간 전에 여기 왔는데…. 그때부터 네 차가 서 있는 걸 보고 있었는 걸.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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