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58)

  • 입력 1998년 9월 23일 19시 07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

10월이 되었다. 일기 예보에서는 태풍이 지나갔다고 하는데도 숲에는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다. 나무가 나무를 후려치고 가지가 가지를 후려치고, 잎들이 잎들을 후려쳐 숲은 온통 뒤집어지고 펄럭거렸다. 아직 어린 밤송이들과 푸른 감이 달린 가지들이 부러져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화살이라도 맞은 듯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상한 아픔 속에서 나는 나를 찾아온 그 통증의 정체를 천천히 이해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실은 그 숲처럼, 숲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처럼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설래야 바로 설 수 없이 가만히 있으려고해도 소용도 없이 미친듯한 바람에 갈래갈래 쥐어뜯기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새들은 둘씩, 셋씩 활처럼 휘어지는 가지에 앉아 우울한 듯도 하고 재미를 느끼는 듯도 한 모습으로 다른 휘어지는 가지에 앉은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따금 가지를 옮겨앉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두 눈 속에 아무 기억도 없는 새들처럼 가볍게, 저 광란의 바람속에서 다른 가지로 무사히 옮겨앉을 수는 없을까. 저토록 가볍게, 동그란 단추같은 눈을 하고…….

그때 규의 차가 올라왔다. 언제나처럼 내 집 앞을 그냥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규는 작정이라도 한 듯 집안 깊숙이,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차를 몰고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랫집을 내려다 보았다. 어디에도 애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더니 곧장 나를 일으켜 세우고 현관 안으로 나의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문을 안에서 잠궜다. 정오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다른 남자를 침실까지 끌어들인 그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희……. 그 부정한 독부처럼. 갈 때까지 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전에 그가 했던 것처럼 냉정해 질 수 없었다. 사건은 늘 이래서는 안된다고 뒷걸음질칠 때 일어난다. 부희 역시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만나서는 안되요. 당신은 내 아이의 아버지이고 내 생의 첫 남자지만 그러나 어쨌든 이건 부정이예요. 아, 안돼요.

그렇게 뒷걸음질치다가 어느날 한순간 격정이 봇물처럼 터져 잠시 현실을 잊고 방심속에서 두 몸이 끌어안을 때 운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쇳덩이처럼 머리를 내려 치는 것이다. 꽝…. 그런데도 나는 왜 두렵지가 않은가. 왜.

꼭 한달 만이었다. 우리는 이제 물 위에 띄운 부표같은 약속조차 하지 않은 채 무엇 때문인지 분명히 모르면서 쫓기는 사람처럼 새삼 견디고 있었다. 내가 견뎌온 것처럼 그 역시 견뎌온 것이었다.

그의 손과 숨소리와 눈이 어떤 떨림 속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가 나의 스커트를 들어올릴 때, 내 속에 돌처럼 무거운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나는 스커트를 말아 쥐었다. 그가 내 눈을 노려보았다. 눈속에 차오른 간절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하면서도 따귀를 맞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내가 보고 싶었나요? 내가 보고 싶었던 거죠? 스커트를 들어올리기 전에 먼저 나를 보고 싶었다고 말하세요. 제발.

사실은 나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고, 하루종일 내 생각이 떠나지 않아 집을 떠 맨 것처럼 온 몸이 아프다고. 매번 집 앞을 지날 때 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고 싶었다고, 나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고, 게임 따윈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고…….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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