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시인 박서원의 자전적 에세이「천년의 겨울을…」

  • 입력 1998년 8월 17일 20시 09분


70년대초, 이문동에 피어나는 꽃은 검었다. 이문동에선 아무 것도 제 색깔을 내지 못했다. 철둑과 철길 사이 사이에 들어선 연탄공장들, 그리고 거기에서 하루종일 날라드는 석탄가루.

그래서 이문동은 집값이 쌌다. 이문동에, 연탄공장 옆에, 철길 가까이에 터를 잡는다는 것은 살림이, 삶 자체가 기울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문동 단칸방에 내쫓겨야 했던 시인 박서원씨. 그는 어쩌면 이 생에 ‘이문동에 피어난 한 떨기 검은 꽃’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남성의 폭력과 여성의 굴레라는 석탄가루에 ‘쐬어’ 도저히 제 빛깔을 낼 수 없었던. 그런 그의 자전적 에세이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동아일보사 발행).

그가 건너온 서른 아홉의 생. 그것은 삶의 연탄공장 주변에서, 삶의 철길 옆에서 무수히 고개를 꺾어야 했던 여성이라는 육체의 좌절, 그 뼈아픈 기억과 상흔으로 가득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폐결핵. 친지들의 배신. 어머니 혼자로는 어쩔 수 없었던 가난. 여고 중퇴. 신문배달, 구두닦이, 사환. 그리고 열 여덟의 어느날, 잔인하게 들이닥친 성폭행…. 그는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발작, 그리고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에 빠지는 희귀한 병(기면증·嗜眠症)에 시달린다. 1백63㎝의 키, 33㎏의 몸무게.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는 수도없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울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그 절망의 끝에서 사랑을 만났다. 22세 연상의 대학교수. 시를 썼던 아버지의 친구. 처음엔 작은 아버지라 불렀던. 하지만 불륜의 사랑은 처절했다. 9년만에 그를 떠나보내고 결혼, 그리고 이혼…. 그는 서른 다섯에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 같았다. 또 다른 만남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맞는 노인처럼 정지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질기고 강렬한 만남, 그의생을온통휘젓어놓을그런만남이기다리고있을 줄이야.

조카 치민이.

자폐증과 비슷한 반응성 애착장애로 말을 못하고 대소변도 가리지못하던 아이. 그 어린 얼굴의 무표정 속에 담긴 세상에 대한 원망(怨望)이 무너져내리던 그를 붙잡았다.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어…. 어떻게든 치민이의 말문을 틔워야 했다. 눈물겨운 사랑과 보살핌, 그 뜨거운 헌신 속에서 그는 하루하루 변해갔다. 그리고 치민이는 기적처럼, ‘망가지지 않은 예쁜 아이’로 다시 태어난다. 이제, 그의 존재에 코알라처럼 예쁘게 붙어있는 작은 남자아이, 치민이. 치민이는 어쩌면 황폐해진 그의 영혼과 육신에 뿌려진, 새로운 생명의 씨앗일지 모른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그는 참 많이 울고, 많이 아팠다.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한가지 문제가 내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삶을 뿌리채 뽑으려 했던, 다시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사건. 그의 육체에서 영혼의 순결을 앗아가버린 열 여덟의 악몽. 그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주치의와 상담을 했다. “용기를 낼 수 없겠느냐”는 조언.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 용기…. 정말 보잘것 없는 인생이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소리죽여 울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용기가 아닐까…. 세번째 시집을 펴내고 당당한 시인으로 홀로 선 그. 가난과 병, 과거의 상처를 딛고 연꽃처럼 피어난 여인. 그는 이제, 이렇게 노래한다.

‘분노가 밤을 건너면/옛날에 꺼진 등불들이/흰눈 쌓인 밤을 밝힌다/…이 완벽한 세계’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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